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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 Mar 30. 2018

[해외취업] 무작정 온 싱가포르, 지지리 운 없던 시작

그 때는 맞고 지금....도 맞다.

 내 브런치는 어떤 액션을 함부로 추천하거나 조장하지 않는다. 나도 그냥 20대 중후반 평범한 청년들처럼 이리 구르고 저리 깨지며 이것저것 터득하고 배워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정답을 줄 수 없다. 나조차도 지금 내가 걷는 길이 정답이라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 년 뒤 후회할 오답 위를 살얼음처럼 걷는 중인지, 신이 나만을 위해 준비하고 만들어 둔 선택지를 집어든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만들어내고 적어 내려가는 브런치는, 자기계발서나 자기 자랑이 가득찬 메시지가 아니지만. 친구처럼 혹은 동아리의 언니처럼, 동시대를 사는 작지만 불안한 존재들에게, '이런 인생도 있다'고 속삭이는 편지다.



 작년 겨울로 돌아가서.

나는 한국을 떠났고, 미국으로 돌아가 영영 한국으로 오지 않을 남자친구를 떠났고, 안정적이고 편했던 직장을 떠났으며, 가족과 친척과 친지와, 스물 몇해동안 내 마음을 다 내어 줬던 서울, 한국을 떠났다. 무지하게 춥고 견딜 수 없이 다정했던 한국의 어느 겨울밤, 태국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 치앙마이는 정말 따뜻했다. 낮과 밤이. 안과 밖이. 외국인과 내국인 모두. 

'치앙마이? 방콕보다 할 것 없는 동네 아닐까? 그냥 가지 뭐.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덴 이유가 있겠지. 가서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것도 먹어보고. 늦잠도 질릴만큼 자고, 내 마음대로 돌아다녀보고, 원하는 건 다 해볼래. 계획은 세우지 않을래. 마사지나 배워볼까? 오, 방콕보다 싸다는데. 아, 몰라. 가자. 생각하지 말자.'

 뭐 이런 마음으로 오만하게 떠난 여행길이었는데, 치앙마이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났던 그 곳에서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내느라 마사지를 배우기는 커녕 놀고 쉬느라 눈코뜰새 없었다. 동물학대를 싫어하기 때문에 동물원이나 수족관도 잘 가지 않았는데, 코끼리 고아원에 가서 코끼리들을 씻겨주고 먹이를 줬다. 아기자기하고 멋진 카페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느라 그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났고, 코끼리 고아원에서 영국 친구 두명 - 후에 싱가포르 생활을 하며 이들을 통해 새 친구를 소개받는다-을 만나 저녁마다 맥주를 마셨다. 해먹에서 책을 읽었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우버 택시 기사와 친해져서, 그 다음날 우버 기사와 함께 로컬도 잘 모르는 치앙마이 강가의 파인 다이닝에 가서 주인장 부부와도 친해졌다.  이런 저런 일이 역시나 많이 생겼던 나의 여행.


그러나. 허니문은 여기까지.(하아....)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 분명 왕복티켓과 임시 숙소까지 알아보고 바우처까지 뽑았는데. 입국 심사에서 걸렸다. 순진하게 80일 정도 싱가포르에서 스테이 할 것이라고 적은 입국카드를 보고, 갑자기 입국 심사관은 안경 너머로 눈을 치켜떴다.

'너 정말 80일이나 싱가포르에 있을 예정이니?' / '여긴 왜 온건데? ' / ' 이상한데.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인데 왜 80일이나 있겠다는 거야? 여기는 2주면 충분한데.' / '여기 아는 사람이 있어? ' / '네가 아는 그 사람들 직업이 뭔데? ' / '넌 학생이야? ' / '80일 동안 있으려는 경비는 얼마 가져왔어? 돈 얼마 가져 왔냐고.' / '아, 그 정도 액수로 세 달정도 있겠다는 거지? 그 돈 일해서 벌었어?' /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어?' / '싱가포르에서 네 계획은 뭔데? 뭐하고 지낼거야?' / '보니까 태국에서 싱가포르로 건너온 것 같은데, 태국에선 뭐했어?'

 간만에 싱글리쉬를 들으면서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벙벙하고 있었는데, 네 말이 잘 이해가 안된다며 웃으며 애교부릴 때가 아니란 것을 그녀와 대화한지 1분 만에 알아차렸다. 여행 길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적 많았지만. 처음으로 싱가포르 입국 심사대에서 느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 뭔가 잘 못 되었구나. 이러다 입국 거부 되서 평생 싱가포르에 못 올 수도 있겠다.

 한 시간 가까이 원하는 서류를 다 보여줬는데도 그녀는 나를 따로 2차 입국심사대(수상쩍은 사람이거나 의심쩍은 인물을 데려와서 취조하는 곳)로 보냈다. 내 뒤로 줄을 서 있던 외국인들의 호기심 + 궁금해하는 눈길들을 뒤로 하고 공항 경찰의 손에 이끌려 심사대 옆의 공간으로 걸어갔다. 4시간 밖에 자지 못해서 온 몸이 쑤셨던 몸뚱아리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 성어를 안간힘으로 붙잡고 극적으로 아드레날린을 분출했다. 거기서 나는 지문 채취를 당하고, 사진을 다시금 찍히고, 똑같은 질문을 해대는 공항 경찰(?) 공무원들의 질문에 상냥하지만 단호한 자세로 대답하고, 게스트하우스 바우처와 한국으로 떠나는 티켓을 보여준 끝에 태어나서 가장 길었던 입국 심사를 끝냈다(......)

 모든 절차를 다 끝내고 시내로 진입하는 셔틀 버스 안에 짐짝처럼 앉아, 창 너머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마리나베이샌즈와 싱가포르 플라이어를 보며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2) 3년이나 알았던 싱가포르 로컬. 그 사람의 비즈니스를 도와주고, 사업 개발에 필요한 통역가를 구해다 주고, 가끔 미팅할 때 클라이언트도 만나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3년이란 세월은, 그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나보다. 싱가포르에 오면 이런 저런 도움을 주겠다고 했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픽업해줄 사람이라도 보내준다 약속했던 사람은. 내가 입국 심사를 다 마치고 나왔을 때 코빼기도 모습을 비치지 않았고 내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다 못해 그냥 싸그리 잊기로 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가 얼마나 도와줬는데?라는 원망과 어이없음으로 생기는 분노는 그냥 접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감정이란.당해본 사람만 안다.


(3)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을 먹다가 우연히 만난 미국인 두명. 취업 준비를 하며 머물 집을 알아보느라 바빠 하루 동안 입 한번 뻥긋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고독감에 지쳐가던 내게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 사람은 반가운 존재였다. 뉴욕에서 온 흑인과, 플로리다에서 온 동양계 미국인. 나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혹시 모를 일을 경계하며 '어머, 내 남자친구도 미국인이야 ^^'라며 선을 긋기 바빴다.

 처음에는 무척 프렌들리하며 유쾌했던 그들은, 브런치를 먹으러 나가는 길에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문신이 잔뜩 있던 그 동양계 미국인은 줄곧 지나다니는 여자를 보며 품평회를 시작했다.

'와, 저 여자 엉덩이 좀 봐. 죽이는데?'

'캐셔 여자애 엄청 귀엽다. 근데 저 목에 초커 목걸이 봐봐. 목 좀 졸라달라는 건가?'

'방금 우리 옆에 지나갔던 백인 여자애 봤어? 몸매랑 얼굴 다 장난 아니네.'

'싱가포르 여자애들은 침대에서 어떨까?'

'아, 저기 횡단보도 건너 편에 있는 애랑 섹스하고 싶다.'

  처음에 내 귀를 의심했고, 몇 번 뒤를 돌아보며 충격받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미친 작자가 다 있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자 뉴요커는 거듭 대신 사과를 하며, 얘가 원래 이런 장난을 잘 친다며 무시하라고 했고 나는 얼른 브런치만 먹고 돌아가야지,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뉴요커였으니. 그가 동남아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랍시고 내게 보여준 사진은 태국 여자, 일본 여자, 싱가포르 여자와 함께 찍은 셀피 뿐이었다. 풍경 사진이나, 음식 사진이나, 뭐 놀다가 찍은 사진이라거나 그런 것 하나 없이. 이상했다. 

"여자들 다 예쁘고 귀엽네. 그나저나 싱가포르 오기 전엔 태국 여행을 하고 온 거야?"

"응. 태국, 일본, 대만 등등 동남아 여행을 하고 마지막 목적지가 싱가포르가 되었네. 근데 그 전에도 나는 아시아 여행을 자주 왔어. 이번이 4번 째야."

"설마 뭐 Yellow fever -동양인 여자만을 좋아하는 일종의 패티쉬-  비슷한 것 때문에 오는 건 아니지이? 왜 이렇게 자주 와, 뉴욕이면 엄청 먼데.ㅎㅎ"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아시아가 좋은 이유를 마구 열거해대며 내 장난에 항변할 줄 알고 슬쩍 그 흑인의 얼굴을 봤다. 그러나 그는, "아. 응 맞아. 사실 뭐 좀 그런 셈이거든." 이라고 순순히 실토했다. 

?

나는 저기 , 뭐라고? 하면서 잔뜩 얼굴을 찡그렸고, 그는 불쾌해하는 내 반응을 보자 급히 수습했다. 그들에게 질린 상태였지만 이미 돈을 지불하고 브런치를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빨리 밥 먹고 개돼지들에게서 벗어나자라는 마음으로 버텼다. 

 빠른 속도로 밥을 먹으면서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언제 돌아갈지 고민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 뉴욕에서 온 미국인 작자가 와서 나에게 셀카를 찍자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어정쩡하게 웃다가, 뭔가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예감이 들어서 깜박이도 켜지 않고 훅 돌진했다.

"갑자기 너 왜 나랑 셀피 찍자는 거야? 설마 너 카메라 롤에 'Asian girls' 컬렉션이라도 만들고 있는 거야?"

"하하하. 어떻게 알았어?"

옛날의 나였다면 사람 좋은 척 헤헤 웃으면서 슬쩍 피하거나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아닌 것에 아니라 말하지 못하고. 기분이 나쁘다면 돌려 말하고. 참을 수 없다면 피해야 하는 가부장적, 유교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었다. 가볍디 가벼운 눈 송이들도, 쌓이면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어느 순간 '아닌 것에 계속 침묵하면 상황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나는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보자보자 하니까. 솔직히 덩치도 나보다 2배는 크고, 2:1의 상황이라 무서웠지만 동양인의 한 명으로써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침묵하면 이 새끼는 계속 이 짓거리를, 영어 잘 못하고 거절 못하고 순한 동양 여자애들한테 계속하겠지? 라는 생각에 눈이 돌아갔다.

"야. 아까부터 Yellow Fever, Asian Fetish 언급하고 지금은 셀피 컬렉션 어쩌고 하는데. 그거 잘 못된 거야."

"뭐?"

"너도 보다시피 난 아시아 애거든?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굉장히 무례한 짓이고, 어디가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는 류의 짓거리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아, 미안해.......사과할게. 내가 그냥 너랑 사진 찍고 싶었던 이유는, 너가 예쁘고 귀엽기 때문이였거든. 미안."

"뭐라고?"

"오해하지 마. 내 말은 네가 아시아 여자애 중 하나여서 예쁘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네 자체로 귀엽다는 칭찬이었어. 정말이야."

"(짜증 섞인 한숨)난 네 말 못 믿겠고. 네 칭찬을 원하지도 않아. 네가 아시아 여자 페티쉬 있다고 내 앞에서 말하는 건, 성차별 적인 언행과 인종 차별적인 사고방식이 합쳐진 최악의 행동이었어. 알아? 난 동양 여자애들 중 하나가 아냐. 나는 나야. 난 그냥 나 자체로 대접받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써 인정받길 원한다고. 뭐? 옐로 피버? 그딴 얘기를 내 앞에서 감히? 어디 딴 데 가서 그딴 얘기 하지 마."

 그는 두 손까지 모아 쥐며 사과를 거듭했다. 그냥 알겠다고 건성으로 말한 뒤, 몇 술 더 뜨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발길을 돌렸다. 무서움이 사라지자 안도감에 다리가 떨렸다. 나한테도 화가 났다. 원했던 건 그저 대화 몇 마디 나눌 친구를 만드는 거였는데. 왜 난 저런 인간 쓰레기들을 만나야 하는가. 그래도 어디 가서 이제 함부로 순종적인 동양 여자 페티쉬 그 딴 얘기는 안 하겠지. 그래, 잘 한거야. 별 생각에 사로 잡혀 그날 하루를 망쳤다.


(4)싱가포르 갑질 면접....


(5)60번에 달하는 서류 탈락. 너무나 가고 싶었던 기업의 최종 면접에서의 탈락.(나이와 경력의 부족). 어리고,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 이라는 신분을 이용하려는 정상 아닌 이들의 대환장파티. 등등


지지리 불운했던 해외 취업의 시작. 아무것도 잘 모르고, 언어도 완벽하지 않고, 연고 하나 없던 새로운 나라에 배낭 두 개 덜렁 메고 와서 아홉 명이 한 방을 쓰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잠들던 날들. 난 내 스스로가 우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다고 자각한 적 없는데. 그 시절 나를 처음 봤던 사람들은 내가 어두운 사람일까봐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워낙 해프닝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서 나도 모르게 침울해졌던 건지도.


 마냥 한국의 삶을 정리하고 그 곳만 떠나면 다 잘 풀릴 거라고, 알아서 척척 일들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나이브한 사람들이 충격과 공포의 서사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좌충우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봤다.


 힘이 들어 다 포기하고 싶을 때 큰 힘을 주던 글귀가 있으니. 

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아빠처럼, 오빠처럼, 남자친구처럼 늘 든든하고 유쾌한 큰외삼촌이 카톡으로 줬던 글귀로, 독실한 신자도 아니지만 너무나 힘이 되는 글귀라서, 삼촌에게 그 글귀를 받은 이후 한 순간도 잊어버린 적 없다. 고맙고 사랑합니다.(근데 전 그만큼 씨를 뿌렸으면 올해 농작은 그냥 대풍년일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추수를 하는 거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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