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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 Aug 14. 2020

스물아홉, 미니멀리스트 되다

떠났을 때 처럼 그렇게 다시

 두 달 간, 코로나로 인한 강제 자택 근무 및 사회적 격리라는 뜨거운 놈을 맛봤다. 영화관도, 요가원도, 예쁜 카페 및 맛있는 레스토랑도, 신나는 클럽과 바도 핏기 없는 무덤처럼 문을 닫았다. 시간은 흘러 모두의 염원 끝에 싱가포르 정부의 국가 준봉쇄령은 사라졌다. 끔찍했다. 그러나 고통 있는 자리에 배움이 있나니. 두 달간 단 일곱 번도 집 밖을 나가지 않았던 나날들 속에서 의외의 발견을 했다. 


  통장을 스쳐만 지나간다고 원망했던 월급이 의외로 조신하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또한 나는 정적이고 내성적인 취미를 선호한다는 점. 또한 필요 없는 물건들과 소비에 그간 얼마나 중독되어있었는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

"봉쇄 되었을 때 내가 이렇게 돈을 안 썼다고? 그런데 다른 달은 어떻게 3배 가까이 차이가 나지, 이거 뭐 잘 못 된 거 아닌가?"

"나 뭐 어디 나사 하나가 빠졌었나? 이게 다 뭐야. 입을 옷 맨날 없는데 내가 언제 이렇게 옷이 많았어?"

 잘못은 개뿔. 돈과 물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잘못은 내게 있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잘못된 믿음' 은, '약속이 잡히면 분별없이 닥치는 대로 두 탕, 세 탕을 뛰면서까지 사람들을 만났던 나날들' 위에서 내 정신과 통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새로운 이들과 교류 후 귀가하는 길에 어김없이 깃드는 허무한 감정과 피곤함, 거절을 못해 잡은 스케줄과 비례해 늘어나는 택시비, 혼자 오롯이 쉬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주말, 친구들과 정신 없이 주고 받은 선물들. 유해했다. 내가 얼만큼 '사람 좋아하는 나' 라는 명제에 집착해왔는지 깨달았다. 불필요할정도로.


또한 '나는 극도로 외향적이니 밖에 나가 노는 활동적인 취미가 최고'라는 착각이 그간 나를 몰아붙였었다는 걸 몰랐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의 요트를 얻어 타거나. 술을 먹고 진탕 놀거나. 밤을 불살라 끝내주는 추억을 쏘아올리는 장면들은 꽤 짜릿했다. 반대로 집에서만 유유자적 보낸 시간은 '주말을 낭비했네' 라며 뜻 모를 자책으로 귀결되곤 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강제로 두 달간 집에서 갇혀 있자, 어렸을 때부터 한 순간도 애정을 놓지 않았던 취미는 바로 내향적인 것들이라는 놀라움을 얻었다. 외향적이라고 취미도 익스트림할 필요가 없었는 데.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사실 이토록 조용히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 데. 싸구려 커피나 맥주를 홀짝이며 옛날 영화를 들춰보거나 감상에 빠져 몇 글자를 끼적여보거나, 혼자 희끄무레한 낙서나 일기를 적어내려거나 아니면, 눈꺼풀을 감고 명상하다 잠들어버리는 그런. 낮잠 같은 순간들. 그런 사소한 취미들이야말로 스무 해가 넘도록 나를 완성시켰다는 것을 인정하자 일말의 해방감이 찾아왔다.


 마음 아프면서도 가시처럼 느껴졌던 것들은 다름 아닌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물질들이었다. 욜로스타일 소비형 인간은 아니다. 다만 오만가지 잡동사니들을 사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랄까. 9년 전 헤어졌던 첫사랑의 편지도, 6년 전 샀던 액정 다 깨진 아이폰도, 둘 곳도 없는 인형들과 빛 바랜 마라톤 메달, 발에 맞지 않는데 예뻐서 사본 비싼 구두. 이토록 무용한 물건들이 내게는 아련하게 박제된 시간들로 보여 처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옷들. 거울 속 달라지는 다양한 스타일을 좋아해서 이런 저런 옷을 많이 샀다. 선물 받은 비싼 원피스, 구제 시장에서 몇 천원 건네고 산 빈티지 니트, 8년 전에 구매해서 아직도 종종 입는 무난한 놈코어 가디건.

 이사갈 일이 생겨 이사 준비를 하다보니 가구는 하나도 없는데 옷이 너무 많아서 끝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계속 정리하다가 지쳐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였다. 다 세보니 100벌 가까이 되었다. 여름 옷만. 이런 미ㅊ - 


 정리하다 지쳐 잠시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다 문득 소라게를 떠올렸다. 소라게는 껍데기 속에서 철저한 혼자다. 많은 것이 필요없지만 알아서 평안하다. 몸집이 커지면 다른 껍데기로 이사를 간다. 그럼에도 부족함이 없다. 오직 자유롭다.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왔을 때의 나처럼. 캐리어 2개, 큰 백팩 1개만으로도 어디든 갈 수 있던. 어리고 가볍던 마음의 무게를 기억해내자 소라게에 조금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삿짐을 싸면서. 코로나로 인한 봉쇄령이 끝났어도 혼자 집에 있으면서. 사무치는 외로움을 견뎌내면서. 동시에 물건을 정리하고 또 버렸다. 더는 내게 필요 없는 옷과 가방, 신발, 화장품, 향초, 베개들에 이별을 고하며 '거창하지 않은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무작정 비우는 것이 아닌.


 어차피 재택 근무를 하면 양 질의 티셔츠와 반바지 정도만 필요하다. 명품 가방은 한 두개 정도 있으니 됐다. 허덕이는 지출을 하며 다시는 구매하고 싶지 않았다. 습관처럼 맨손톱과 발톱을 가리려고 한 달에 한 번은 네일샵에 가던 발길을 끊었다. 자꾸 보다보니 맨손과 맨발, 그 색이 맑아 나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지 않는다는 대명제도 철저히 지키기로 했다. 원래도 별로 없었지만 인터넷 쇼핑 앱은 다 지웠다. 부족한 것은 메모장에 따로 적었다. 수건 사기, 세제 사기, 샐러드 사기, 토마토 사기. 일주일 식비는 60불로 제한했다. 싱가포르는 물가가 비싸서 어쩔 수 없지만, 이왕에 건강식 요리하는 법을 익혀 먹다보니 그리 비싸지 않았다. 주말 유흥비도 기준을 세웠다. 한 번 시작하면 재미가 없어도 끝날 때까지 술자리를 지키며 몇 백불씩 술값과 음식값으로 낭비하는 시간들. 이제는 나를 위해 그만두기로 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이가 보자고 하면 거절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더 분배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도때도 없이 사놓고 막상 잘 입지도 않던 옷 쇼핑도 때려치우기로 했다. 정 색다르게 꾸미는 욕망을 감추기 어렵다면 그 땐 싱가포르의 패션 구독 서비스를 가입해서 옷을 빌려입을 것이다. 우리의 지구별과 내 미래를 저당잡히고 싶지 않아서이다. 일 년에 한 두벌 정도만 옷을 사고 싶다. 화장품도 그 때 그 때 다 떨어지면 구매하고, 신상품이나 독특해보이는 색조에 관심이 있어서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행위는 지양하려 한다.


 대신 나는 유해하고 무익한 소비와 넘쳐나는 물건들에 주력했던 시간들을 내게 보상하고자 한다. 다양한 음악을 듣고, 그 가사를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쓸어보며, 목으로 넘어가는 음료수의 향과 맛을 끝까지 즐기며 책을 읽고, 일면 무료해보일 수 있는 '나만의 시간'들을 맥시마이징하려고 한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에게 연락을 많이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에게 음성메시지로 사랑한다 전하고, 조용히 달과 별을 헤며 '아무 것도 안하는' 시간에 빠져볼테다. 그림을 그려보고, 요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진정성이 담뿍 든 교감을 누리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러모으겠다. 볼 수 없는 것들일수록 가슴 속에 오래 남는 법이니까.


 알고보니 나는 옷이 많지 않아도, 밖에 나가지 않아도, 화장품이 별로 없어도, 방이나 집에 가구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편해지려고 미니멀리스트로 살기로 했다. 동시에 내가 소유한 물질은 최소화하되 순간을 최대화시키는 그런 '맥시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내일 더 자유롭도록. 오늘 더 편안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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