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전자 음악단
글 - 김현성(가수)
사진 - 윤여은(사진작가)
광화문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주말 저녁치고는 광장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찬 공기가 거대한 군중처럼 내려앉은 광장은 얼음처럼 투명해 보였다.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촛불과 함성으로 일렁이던 일 년 전 이곳. 정말이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혁명이라 부르게 될, 그해 겨울 일어났던 모든 일들. 그때 우리는 한 부도덕한 정치인을 비판하기 모인 것만은 아니었다. 촛불은 오랜 세월 우릴 옥죄어 온 것들에 대한 거부였고 행진은 더 나은 세상으로의 한걸음이었다. 책에서 읽고 상상했던 혁명과는 달랐지만 우리가 이뤄낸 일들은 분명 혁명적인 것이었다. 지금 광장의 모습은 성공한 혁명의 증표일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얼마쯤 가닿은 것일까? 아니,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꿨던 것일까?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씁쓸하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던 노래가 있다. 서울전자음악단의 「서로 다른」이다. 왜 하필 그 노래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문득 떠올랐고, 8차선 도로에 차들 대신 사람들이 삼삼오오 걸어가던 그 밤에 이어폰 너머로 노래가 흘러나온 순간 텅 비어 있던 내 마음은 어떤 위로의 온기로 데워졌다.
똑같은 벽돌들 사이에 / 서로 다른 미소가 있네 / 바닷가에 자갈들 위에 / 서로 다른 아픔이 있네 / 가는 곳은 모두 다르지만 / 지금 같은 곳에서 만났네 / 입고 있는 옷은 똑같지만 / 서로 다른 곳으로 고개를 숙이네 / 입고 있는 똑같은 옷자락 위에 / 서로 다른 먼지들이 따라와 쌓이네 / 서로 다른
똑같은 철길 위에 / 서로 다른 기차가 가네 / 산 위에 나무들 위에 / 서로 다른 얼굴이 있네 / 맡은 역은 모두 다르지만 / 모두 무대 위에 주인공 / 입고 있는 옷은 똑같지만 / 서로 다른 곳으로 고개를 숙이네 / 입고 있는 옷은 똑같은 옷자락 위에 / 서로 다른 먼지들이 따라와 쌓이네 / 서로 다른
다른 어떤 노래가 그때의 내 마음을 그렇게 달래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분명 이 노래와 당시의 상황은 공명하고 있었다. 노래의 메시지 때문이었을까? 가사와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는 노래지만 내가 위로 받은 것이 시적인 가사 덕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노래가 시작되고, 무심한 듯 툭, 툭, 울리는 비트 위로 기타 리프가 흐를 때 나는 이미 노래에 마음을 맡겨버렸으니까.
어쩌면 그건 그저 이 노래가 무척 아름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석철의 드럼은 노래와 다른 악기들의 결에 따라 세고 여림을 조절하며 감정을 전한다. 연기로 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치열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 같은, 조금 다른 경지의 연주다. 멜로디는 편안하게 흘러가지만 세상의 어느 노래와도 닮지 않았고, 메시지는 적절한 비유의 언어로 진정성 있게 전달된다. 이 노래에서 가장 빛나는 건 역시나 신윤철의 기타 솔로일 것이다. 4분 가까이 이어지는 기타 연주는 어떤 과시나 이질감 없이 감정의 결을 따라 흘러간다. 세련되고 정제된 레코딩 연주라기보다 라이브 공연에서 ‘필 받아서 한 번에 간’것 같은 연주다. 그것이 곡의 메시지, 정서와 무척 잘 어울려서 그 이상의 무엇이 더 필요하다거나 덜 표현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 곡이 실린, 그해 최고의 음반으로 꼽히는 서울전자음악단의 2집은 경기도 퇴촌의 한 가옥에서 2년에 걸쳐 홈 레코딩 방식으로 녹음되었다. 신윤철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듣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중음악의 현실에 대한 반기, 자연스레 음악에 스며든 저들의 결기가 몹시 추웠고 모든 것이 불투명해 보이던 그날의 내 마음과 공명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불투명한 현실을 비집고 태어난 이 노래가 나에게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 인상으로 전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광장을 거닐며 오랜만에 다시 노래를 들었다. 노랫말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다. “똑같은 벽돌들 사이에 서로 다른 미소가 있네, 바닷가에 자갈들 위에 서로 다른 아픔이 있네, 입고 있는 똑같은 옷자락 위에 서로 다른 먼지들이 따라와 쌓이네, 서로 다른…….” 노래는 전처럼 치열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여전한 온기로 추위를 녹여주었다. 음악으로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새삼 경이롭게 느껴졌다.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7분 남짓한 이 노래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가사를 곱씹으며 다시 한 번 촛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때 우리가 광장에 모인 것은 그렇게 각각의 서로 다른 의미들을 단순화하고 포섭해 억압하는 낡은 관습과 체제에 대한 거부의 표시가 아니었던가. 그것을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으로부터 우리가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각자의 가치와 의미가 존중 받는 세상이 우리가 촛불로 얻고자 한 것이었다면 이 노래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노래인 셈이다.
* 「서로 다른」은 서울전자음악단이 2009년에 발표한 2집(Life is strang)의 수록곡이다. 이 음반으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과 ‘최우수 록 음반’을 받은 그해에 밴드의 주축인 신석철(드럼)이 팀을 탈퇴하며 잠정 해체하게 된다. 2014년, 서울전자음악단은 신윤철(기타)을 중심으로 손경호(드럼), 이봉준(베이스)과 함께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