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이근형
1980년대 중반 헤비메탈 키드들이 있었다. 후에 부활, 시나위, H2O 등의 이름으로 가요계에 뛰어드는 틴에이저들. 두각을 보이던 키드 중에 이근형도 있었다. 그의 연주는 또래 밴드들 사이에서 단연 발군이었고 그와 비교할 만한 인물은 신대철이 유일했다. 헤비메탈 밴드 1세대가 활약한 건 1986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5~6년에 불과하다. 방송에 비친 이들의 모습은 당시의 반듯한 스타 가수들과 비교하면, 불시착한 외계 종족 같았고 그런 이질감은 이들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까지 극복되지 못했다. 이들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는데, 1991년 방송에서 말쑥한 외모로 머리를 넘기며 「이 밤이 지나면」을 부르던 임재범의 모습이 그들의 현주소였다면 아이들과 함께 등장한 서태지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록밴드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은 이근형의 음악 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로 제작자들은 ‘좀 더 격렬하게’ 록밴드를 외면했다. 이근형은 밴드 활동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록음악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동생 이근상과 함께 신성우의 음반을 제작, 프로듀싱했다. 이근형과 신성우가 함께 작곡한 「내일을 향해」는 반 헤일런 풍의 경쾌한 록 넘버로 그해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모든 공을 신성우의 환상적인 외모에 돌렸다. 하지만 그 노래는 도입부에 날카로운 초킹과 함께 스물네 마디 동안 이근형의 기타 연주가 이어질 때(거의 1분 동안!) 이미 당시의 가요와는 차별되는 뜰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그건 정말 신나는 연주였고, 진짜 록이었고, 반항기 가득한 록 뮤지션이 가요계에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었다. 록 뮤지션으로서 그의 자존심은 「서시」의 서정적인 연주에서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런 노래는 자주 나오는 것이 아니었고 당시 업계의 풍토도 건강하지 못했다. (잘 알려진 노래지만 나는 ‘서시’를 다시 한 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이 노래에선 정통 록과 가요가 황금비율의 지점에서 만난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정통 록에서 파생된 걸 가지고 하려는데 그걸 (제작자들은) 어수룩한 거라고 생각하더라고. 일본 음악의 매끄러운 구성을 해야 잘 팔리는데 나한테 그게 맞지도 않고…….”
「내일을 향해」, 「서시」 이후 이근형의 존재가 업계에 알려지고 있었다. 작곡보다는 기타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기타 톤이나 솔로 연주가 남다르다 보니 다들 놀라고 신기해했다. 당시엔 기타 솔로를 만들어 칠 수 있는 연주자가 거의 없었고, 그는 독점하듯 매일 밤 녹음실에 불려 다녔다.
“(함)춘호 형하고 같이 가면, 나는 기다렸다가 간주에 솔로만 치고 집에 가는 거야. 그때는 ‘야, 이거 정말 쉽게 돈 번다’ 생각하고 좋은 일이구나 했지(웃음).”
이근형은 처음엔 세션을 오래할 생각이 없었다. 녹음을 마치고 나와도 진짜 음악을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전문 연주자라야 반주자 정도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록 뮤지션의 자존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그런 인식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다. 「서시」를 녹음할 때였다. 섭외한 베이스 세션의 연주가 너무나 뛰어났던 것이다. 그는 ‘잘하는 사람들은 다 여기 있구나.’ 생각했고, 어둑한 녹음실이야말로 최고 뮤지션들의 무대라는 걸 깨달았다. (그 연주자는 신현권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전문 세션으로서 익혀야 할 기술과 이론을 공부하고 어쿠스틱 기타 연주법도 본격적으로 익혔다.
세션 연주자로서 그는 임재범, 스카이, 조성모 등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후 록발라드의 음악적, 상업적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노래가 절정으로 치닫는 격정적인 기타 솔로의 대부분은 이근형의 연주라고 봐도 될 정도다. 록발라드 외에도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김범수의 「보고 싶다」에서의 따듯한 어쿠스틱 기타, 김건모의 「서울의 달」에서의 블루지한 연주까지 모두 이근형의 솜씨다. 그의 강점은 간결하고 섬세한 연주로 곡의 정서를 정확히 담아내 전달하는 능력이다. 아직은 미숙했던 작은 하늘, 카리스마 시절에도 이근형의 연주는 절제된 완벽주의의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그런 성향이 그를 자연스럽게 세션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포크, 블루스, 퓨전 재즈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탁월한 연주를 들려준다. 이십 년 이상 정상급 기타 세션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음악에 관한 연구와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교한 연주는 심플한 데서 나와. 심플한 데서 욕심 없이 나오는 노래나 연주는 살아 있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 요즘 친구들은 복잡하게 연주한단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음악을 정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이야. 지미 헨드릭스나 레드 제플린이 정리된 음악은 아니잖아.”
요즘 그는 음악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정교하게 연주하던 것을 다시 ‘러프’하게 되돌리려 한다.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를 좋아했던 시절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 시작점이 기타리스트 이근형의 ‘마지막 정리’일 것이다. 그는 예전에는 자신의 연주와 음악에만 집중했다면 지금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더 잘 보려고 애쓰고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해 주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음악적 깊이 만큼이나 성숙해져 있었다. 문득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1990년대 말, 스튜디오에서였다. 당시 그는 깡마른 체형에 무표정한 얼굴의, 어딘가 까칠한 인상이었다. 그는 한 시간 남짓 두 곡을 말끔하게 채운 뒤 모니터를 하고는 악기를 챙겨 떠났다. 대화 한마디 나눈 기억도 없다. 그는 요즘도 후배들로부터 “그때 그냥 가버리셨잖아요” 하는 핀잔을 종종 듣는다고 한다.
“지금은 안 그래. 녹음실에서 사람들하고 얘기도 많이 하고 다음 녹음 없으면 기다렸다 가곤 하지. 후회하니까, 음악 하는 것도 사람처럼 해야 하잖아(웃음).”
그가 말하는 후회나, 사람다운 음악은 아티스트로서 철저히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제껏 음악만이 전부였다면 인생을 보기 시작한 그가 들려줄 음악은 어떤 것일까.
기타리스트 이근형_ 1987년, 헤비메탈 밴드 작은 하늘 1집으로 데뷔했다. 김도균, 김태원, 신대철과 더불어 헤비메탈신의 당대의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보컬 김종서, 드러머 김민기, 베이스 박현준과 함께 밴드 카리스마를 결성해 당시 가장 진보한 헤비메탈 음악을 선보였다.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경력을 기반으로 1990년대 내내 독보적인 세션 연주자로 활약했다. 2013년에는 베이시스트 신현권, 드러머 김민기와 함께 3인조 록밴드 S.L.K.를 결성해 활동했으며, 현재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1집 음반을 녹음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