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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12. 2024

헛수고란 없다.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장만한 부모님의 첫 집, 다세대 주택.

우리 집은 말만 주인집이지 방한칸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자취생이 들어와 앉았다. 겉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우리 집도 자취방 같아 주객을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자취방과 구분되는 것은 화장실이었다. 우리 집 안에는 화장실이 있었고, 다른 자취생들은 밖의 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자취생들은 서로 데면데면했는데 평소에는 서로 인사 없이 지내다 화장실 앞에서 몇 마디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8살 내 눈에 자취생 언니 오빠는 하나같이 대단하고 큰 사람들이었다. 키도 나보다 엄청 컸고, 엄마랑 안 살고 혼자 사는 것부터가 이미 어나더 레벨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시절 1학년은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돌아왔다.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이 방 저 방 돌아가며 언니 오빠들과 노는 것이 재밌었다. 그중에 한 언니는 전남 벌교에서 왔는데 이 근처 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다고 했다. 그 언니 이사 올 때 집채만 한 피아노가 같이 들어왔는데 동네 아저씨들 여러 명이 낑낑대며 들어 옮기느라 아주 혼이 났다. 난 그날 난생처음 피아노를 마주했는데 그 웅장함에 대단히 압도되었다. 그 후 나는 언니 집을 내 집같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가끔 같은 교회 다닌다는 언니 남자 친구가 집에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 오빠는 자꾸 나를 집에 가라고 했다. 어깃장 놓느라 드러누워 안 가고 버티기도 했지만, 등 떠밀려 내 보내진 날엔 집에 돌아가기 억울하다며 언니 방 문 앞에 앉아 둘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나를 자꾸 집에 보내려는 오빠가 이상했지만 크게 말리지 않는 언니도 얄미웠다.


언니 남친이 오지 않을 때에 맞춰 언니집에 다시 줄기차게 들락거렸다. 뚜껑을 열면 하아얀 이빨처럼 빛나는 건반을 보며 그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움에 발을 동동거렸다. 조심스럽게 눌러보고 두드려 보며 왼쪽으로 갈수록 아저씨 목소리, 오른쪽으로는 아줌마 목소리가 난다고 나란 어린이는 금방 흥분했다. 동요를 연주해 주는 언니의 작고 하얀 손이 예뻤다. 언니 옆에 앉아 피아노를 듣고 있자면 언니의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의 첫 피아노는 샤르망 샴푸향이었다. 


엄마는 언니에게 피아노 교습을 부탁하고 사글세에서 교습료를 제했다.

시작은 즐거웠으나 틀릴 때마다 꼬리빗으로 손등을 맞아야 했고, 많아진 콩나물 대가리는 나의 열정을 여러 번 꺾어놓았다. 나는 자주 배가 아팠고, 몸이 피곤했고, 숙제가 많았고, 손가락이 아팠다. 핑곗거리를 찾기 급급하던 사이 언니는 졸업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집 앞의 피아노 학원에서 그 핑계들을 계속 이어갔다.


손발 다한증에 한 여름 손가락 사이에는 땀띠가 솟고 땀방울이 맺히기도 했다. 이런 손으로 피아노를 치니 하얀 피아노 건반에는 금세 구정물이 고였고, 화음을 짚는 손가락이 자주 미끄러졌다.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모시옷을 입고 나간 피아노 대회에서 연신 손의 땀을 닦느라 옷의 풀이 손에 묻어 건반을 끈적하게 만들어 놓은 채 내려오기도 했다.


무던했다. 흥미라곤 진작 잃어버렸지만 15살까지 지속한 것을 보면 참으로 무던했다. 어쭙잖게 배운 화성으로 교회 고등부 예배 반주도 했지만 자꾸 음을 잘못짚는 바람에 찬양시간을 자주 망쳤고 그 죄책감에 매주 시달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피아노를 배운 것을 누구에게도 비밀로 부치고 있다. 이 글은 나의 오랜 고백이다.




남의 집 아이도 배우니까 너도 배우라고 아이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열정 없이 배웠던 나의 어린 시간이 아까워 슬펐다. 은유가 하고 싶은 악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때마침 학교에 새로 오신 음악선생님이 은유의 마음에 불씨를 지피셨고, 바이올린을 배워보겠다는 은유의 결심이 다부졌다. 의지와 동기가 동반된 배움에는 확실히 그 이상의 결과가 따라왔다. 밤낮으로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배우지 않은 악보도 겁 없이 시도해 보는 자세가 나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와중에도 아쉬운 것은 있었다. 음감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원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바이올린은 운지 위치에 따라 미세하게 음의 높낮이가 변하는데 조금이라도 잘못짚으면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음색이 된다. 음감이 자리 잡으면 스스로 자신의 음색을 듣고 교정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음감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익히는 것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숙제다.


피아노는 잘 못 쳐도 은유 연주곡의 음이탈을 가뿐히 알아챈다. 반올림과 반내림을 놓치면서 어색해진 음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내고 보다 정확한 피드백을 할 수 있어 그런 내가 놀랍고 대견했다.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은 어떻게든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이제는 믿어야 할 것 같다. 당장은 의미를 찾지 못해 그 이유를 모를지라도, 들인 시간이 배신하는 법은 없었다. 

계이름을 외워 부르고, 오선지의 줄과 칸을 세어가며 음표를 익혔다. 암보를 하고, 머릿속부터 손가락까지의 잡초밭에 아스팔트를 깔고 다리를 놓는 자세로 부단히 연습했다. 인지하지 못했을 뿐, 이미 오랜 시간 지난한 연마의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다.

실력은 없어도 실행력은 있었다. 지속한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식으로든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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