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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Nov 08. 2024

노년의 키스

미움도 원망도 애처로움도 헐렁해져

늘 가는 공원에 늘 앉는 내 벤치가 있다. 천공으로부터 내리쬐는 태양이 숲의 캐노피와 만나 지상으로 드리우는 그늘이 이 순간 벤치 위에 앉았다. 내 벤치는 공원의 안쪽 깊고 외진 곳에 있는데, 오는 길에 지나온 몇 개 벤치들의 유혹을 이겨내야 마침내 '내 벤치'에 와닿을 수 있다. 내 이름을 써 놓거나 내가 만들어 놓은 벤치도 아닌데 나는 그 벤치를 '내 벤치'라고 부른다. 


오는 길에 지나 온 벤치는 평일만큼이나 한가했는데, 그중 가운데 한 벤치만 열일 중에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쌍의 노부부. 

아내는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려 벤치 위에 길게 뻗었다. 팔도 걷고 스카프도 풀어 몸의 곳곳을 햇빛에 열어주고 있었다. 구석구석 비춰드는 수많은 빛줄기가 옷의 날실과 씨실 사이에도 비집고 들었다. 받으려는 뜻을 보이면 양껏 베풀어주는 태양이다. 

아내의 허연 다리만큼 밀려난 남편은 반대쪽 손잡이에 몸을 기대 주머니에 담아 온 해바라기씨를 부지런히 까먹고 있다. 껍질을 이로 물어 벌린 틈에 고소하고 은은한 맛이 들어있다. "카차카차" 껍질 까는 소리에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박의 리듬이 깃들어 있었다. 노부부로부터 150미터 거리에 있는 내 벤치에서 나는 관절을 비틀고 펴며 밤새 촘촘해진 근육과 뼈사이를 넓히고 벌린다. 연못과 맞닿은 난간에 다리를 번갈아 올리며 허벅지 뒤쪽의 근육을 깨운다. 그렇게 발 바꾸기를 여러 번. 노부부 쪽으로 무심코 돌린 시선에서 내 눈을 의심했다. 


노인도 키스를 하는구나. 


눈 비비고 다시 보길 여러 번. 부쩍 흐려진 시력에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의 입술을 가리며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나무를 요리조리 피해 그들의 키스를 관망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입을 여러 번 맞췄다 뗐다. 장난스러운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싫고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다 받아줬다. 선크림이 눈에 들어간 것 같이 시리고 흐린 눈의 초점 안에서 그들은 사랑을 속삭이는 10-20대 청년의 얼굴과 다름없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기차역에서, 젊은이들의 키스를 종종 마주친다. 이들의 키스는 뜨겁고 화려하다. 뜨겁기 때문에 에너지의 흐름이 빠르다. 에너지를 감측하는 카메라가 있다면 그들 입술에서 시작한 기운은 파도처럼 일렁여 전신을 감싸는 모습일 것이다. 불꽃이 튀어 내 살에 닿을까 나는 저만치 멀리로 피하고 만다. 


한편, 노인의 키스는 따뜻하고 소박하다. 메마르고 거친 입술에 내려앉은 낙엽의 느낌으로 상상해 본다. 그들 키스의 온도는 안정적이다. 주변으로 번지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없지만 안으로 느긋하게 내려앉은 묵직하고도 가볍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애정 가득함이 있다. 아직 입에 남아있는 커피 향과 해바라기씨의 고소함이 자연스러워 싫지 않다. 일일이 까서 한 손 가득 쥐어주는 씨앗 한 줌에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들의 키스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부인할 수 없이 줄어가는 삶의 잔고와 생애의 결산 앞에서 일몰의 태양은 일출만큼 빛났다. 더 화창하고 더 빛날 수 있었던 옛날을 후회하기엔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다 못해 귀중하다. 머리에 서리 내리고 등 굽어 가는 노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마주 댈 때, 미움도 원망도 애잔함도 헐렁해져 그냥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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