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싱지원 May 11. 2021

위-아래, 위위 아래

올라간다 창원, 내려간다 서울

 연인은 서울, 나는 창원에 산다. 한 번은 내가, 다음번엔 연인이 번갈아 여행을 떠난다. 둘 사이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종종 연인은 창원에 올 때 '내가 올라갈게'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서울을 상대적으로 위에 있고 창원은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내려간다'라고 해야 맞다고 고쳐줘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고쳐 쓰지 않는다.     


 그렇게 우연히, 연인의 실수? 습관에서부터 단어 선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 설과 추석에 우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귀성길,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귀경길이라는 말을 쓴다. 전국 8도로 나뉘어있는 고향으로 향하는 수많은 갈래 길은 귀성길이라는 단어 하나로 함축되는데 반해 목표지 한 곳, 서울로 가는 길은 귀경길이라는 단어와 1:1대응이 성립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귀성길, 귀경길이라는 말이 통용되어 왔던 걸 보면, 아마도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로 향하는 사람들이 예부터 꽤 많았던 것 같다. (그게 대부분 성공한 사람이었을 테다.) 오죽하면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라는 속담까지 있지 않나.    


 그런데, 생각해 볼 일이다. 지도 상 서울보다 위쪽에 위치해있는 강원도나 내가 자란 경기도 의정부도 서울에서 갈 때 ‘올라간다’고 하던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서울과 타 지역을 구분할 때 위-아래는 위치 개념이 아니라 높고 낮음의 주관적 가치가 포함된 ‘평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수도권이 아닌 각 지방에서 자란 친구들이 생겼다. 친구들과 사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본인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던 때가 있었는데, 솔직히 당시엔 관심 밖이었다. ‘아 그렇구나, 살기 좋겠네’ 같은 예의상 반응만 해줄 뿐이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친구가 ‘인구 64만의 도시를 무시하느냐’고 발끈했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본인이 사는 도시의 인구가 몇 명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로서는 충격에 가까웠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경기도 의정부의 인구를 검색했다. 그만큼 서울 아닌, 정확히 말해서는 수도권 아닌 다른 지역에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아나운서 일을 시작한 게 경북 포항이었다. 한 치의 고민이나 의심도 없이 기쁘게 ‘내려왔다.’ 부모님 슬하를 떠나 처음으로 독립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창원에 신입 발령을 받아 지금까지 지방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지방생활만 통틀어 3년 하고도 6개월이 넘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경제생활을 영위하면서 그것도 혼자, 삶을 꾸리다 보니 이제는 수도권 자아 반, 지방 자아 반. 딱 잘라 반은 아니어도 절반에 가깝게 나를 구성하는 자아가 변하고 있다고 느낀다. ‘시골에 가서 사니 어때’라는 친구의 무심한 한 마디에 ‘인구 100만 대도시 창원을 무시하느냐’며 발끈하는 나를 볼 때, 참... 사람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또 한 번 느낀다.    


 내가 선택한 삶이라 그럴까. 지역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주변인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나는 이곳에서의 삶을 나름대로 잘 꾸려가고 있다. 내 삶의 속도를 내가 규정하고, 행복에 조금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인과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점 말고는 흠잡기 어려울 정도다.(이게 큰 흠 일지도...?) 그러나 가끔 내 선택을 폄하하는 상황들을 접할 때면 생각이 많아진다. 분명 그도 나를 위해 건넨 말이겠지만 ‘여기 있기 아깝다’는 말.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겠다’는 말. 어떻게 해서든 본사 발령을 기다리는 동료들. 다른 직군으로 옮겨야만 본사에 입성할 수 있다는 공고한 중앙의 벽. 그런 것들을 마주할 때면 괜히 속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문화, 경제, 정치, 사회. 모든 자원들이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어쩌면 사람들의 욕망마저 수도권을 향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사람들의 욕망과 정반대로 향한 내가,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한 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지방이 상승 시도에 좌절한 사람들만이 남는 패배자의 터전으로 인식돼서는 안 된다. ‘위’에서는 미어터지고 있고 ‘아래’는 부족에 허덕이는 게 현실이라면 그 불균형이 해소될 때 비로소 복잡하게 얽힌 사회 여러 문제 - 과다 경쟁, 치솟는 집값, 지방 소멸, 의료 격차 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토박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모들에게는 자식이 서울에서 직장을 구했다는 게 자랑이라고 한다. 어느 회사인 지보다 더 중요한 건, 서울이라는 위치. 그 지방이 가진 상징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선택을 어느 누가 비난할 수는 없다. 지방을 떠나려는 사람도, 나같이 서울을 떠나온 사람도 제각기 이유는 다를 것이다. 다만 그 선택의 이유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타의에 의한 선택은 더더욱 아니었으면 좋겠고.    


  연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편견 없는 단어 선택이 괜히 고마워졌다. 나도 앞으로 그에게 장단을 맞춰서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은 쓰지 않기로 했다. 늘 그렇듯 인생은 또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일이라 내가 다시 부모님 곁으로 가서 살지, 새로운 곳에서 삶을 꾸리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서울이나 창원이나. 여기나 거기나. 똑같은 헬-조선 아니던가. 위 아래는 개뿔!

매거진의 이전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