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연인 '진우'를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온 '현민'은 동네 성당에서 시를 가르치게 된다. 첫 수업에서 그는 시가 목적어와 서술어의 관용적인 연관 관계를 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다. 현민이 '휴대폰'이라는 목적어를 제시하자 '꺼낸다', '넣는다', '던진다', '부숴버리다' 등의 서술어가 자연스럽다는 답들이 튀어나온다. 얼마 후, 그가 '휴대폰'이라는 글자가 지워진 자리에 '가을'을 넣는 순간 우리의 기억은 기적을 부리기 시작한다. 옷장 구석에서 꺼낸 가을 카디건, 짧게 저문 가을을 아쉬워하며 책 사이에 넣던 코스모스, 푸른 하늘로 쉽게 날아오르던 연, 발밑에서 바삭거리며 부서지던 낙엽들… 삶이 시가 되는 기적.
누군가의 삶은 가을을 던진다는 추상적인 행위만큼이나 생경하기 마련이다. <정말 먼 곳>의 주인공들이 꼭 그러하다. 한때 그림을 그렸으나 지금은 양떼목장에서 일하는 '진우'와 목장 가족들, 그의 연인 '현민', 진우를 엄마라 부르는 아이 '설', 진우의 쌍둥이 여동생 '은영'. 이들 사이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목장에 오기로 했다던 친구가 사실은 오랜 연인이고, 부녀로 비쳤던 이들은 삼촌 조카 사이였으며, 평화롭게 펼쳐지던 목장 풍경은 극적 긴장감으로 가득했음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 모든 것을 깨닫는 순간 영화는 먼 곳을 응시하던 우리에게 현재를 던진다.
아빠의 자리에 엄마를, 어린이집의 자리에 양떼목장을, 여자의 자리에 남자를, 남의 자리에 님을, 소멸의 자리에 탄생을, 끝의 자리에 시작을 넣어보는 시 같은 영화, <정말 먼 곳>을 소개한다.
영화란 실체를 보여주는 것에 특화된 매체이다. <정말 먼 곳>은 그런 영화적 장점을 최대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픽스된 채 인물들을 관찰할 뿐인 카메라는 극의 클라이맥스에서까지 느즈막한 호흡을 놓지 않는다. 사람의 발화가 양떼의 울음소리보다도 연약하게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한 마디쯤 할 때가 됐는데.' 싶은 순간에도 인물들을 그저 입을 닫아 버린다. 특히 진우가 그렇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이유 없음도 이유다
-황경신, <생각이 나서>-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안 되면 아빠라고 부르냐는 조카 설이의 물음에 그는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서울로 애인을 찾으러 가는 거냐는 중만의 질문에도 알 수 없는 표정만을 떠올린다. 해야 할 말을 하는 것보다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아는 진우는 고요로써 대답한다. 현민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쑥덕대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저 날 선 눈빛을 던질 뿐이다. <정말 먼 곳>의 무기는 여기서 드러난다. 침묵해야 하는 이들을 침묵하지 않고 조명하는 영화의 힘 또한 우리를 크게 울린다.
<정말 먼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원경이 아닌 근경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강원도의 수려한 금수강산에 시선을 빼앗기다가도 우리를 정말 사로잡는 것은 그 속에 나무처럼, 한 줌의 꽃처럼 녹아든 인물들의 서사이다. 독립영화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 작품만의 매력이 단순히 강원도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기인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싶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는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 정말 먼 곳, 박지은
현민과 진우의 관계는 지금 여기에 실재하지만 그들은 자꾸만 정말 먼 곳을 꿈꿔야만 한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외딴 외국 마을로 가 양을 기르고,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시를 쓰는 일상을 조용히 속삭인다. '우리 그냥 어디로 도망가서 살까?'라는 현민의 음성은 어딘가 아득하다.
그들의 현재에는 양들과 푸른 목장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아름다운 풍광이, 시와 그림과 삶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연인만으로 완벽한 세상이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유리창 구석의 얼룩을 지워내느라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것은 비참하지만, 그것마저 닦지 않는다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난과 갈등뿐 없다.
처음에는 양이 죽었고, 끝에는 양이 태어났다. 퀴어 서사에 온전한 가족 구성원인 아이와 할머니를 등장시킨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는 현민과 진우는 사회적으로 완전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임을 공고히 한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해체된 가족과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보여주면서도 회복 가능성을 분명히 한다. 떠나야 할 이유와 붙잡혀야 할 이유가 공존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원경을 향해 아득한 걸음을 내뻗는 것, 근경에 머무르며 주위를 끝없이 다듬어 가는 것.
시 같은 삶이 꼭 그렇다. 아득하면서도 생생하다. 익숙함의 자리에 익숙하지 않음을 끼워 넣으며 우리의 근경을 원경으로 넓혀가는 수밖에.
2020.03.08/ 명동 씨네라이브러리 CGV
아트인사이트 리뷰: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