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섬 사람이 된다는 것: 섬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
섬을 떠받드는 것은 바다도, 암초도, 오랜 역사도 아닌, 바로 떠받들겠다는 의지 그 자체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잉그리드는 완전한 섬의 일부가 된다.
본토에서 상당히 유리된 외딴 섬 중에는 단 한 가구만이 사는 곳이 있다. 바로 바뢰이 섬이다. 그 이름마저 가족의 성을 따 지은 이 섬의 사람들은 집을 보수하고, 물고기를 잡고, 우유를 짜며 오리털을 고르는 일상으로 섬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간다.
아버지 한스, 어머니 마리아, 할아버지 마틴, 딸 잉그리드, 한스의 여동생 바브르, 그의 아들 라스, 후에 섬의 일원이 된 펠릭스와 수잔까지. 모두 섬이 품은 이들이다.
"폭풍은 널 해치지 못해." 한스가 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하지만 잉그리드는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들리지 않았다. 그는 섬이 요동치고 하늘과 바다가 사나워졌지만 섬은 흔들릴지언정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으며 영원히 그 자리에 딱 붙어 있다는 걸 몸소 느껴 보라고 소리쳤다. 이 순간 딸과 공유하고픈 신앙 같은 거였다. 한스는 날이 갈수록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 딸 하나로 만족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섬이 절대 좌초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가르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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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들이 가장 먼저 체화해야 할 것은 그물을 엮는 일도, 노를 젓는 일도 아니다. 바로 섬의 견고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여섯 살 남짓한 딸 잉그리드를 폭풍우 사이로 내몬 한스의 행동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폭풍우가 지붕을, 말려둔 물고기들을, 창문을 흐트릴 수는 있어도 섬과 그 속에 깃든 섬사람들의 정신은 온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딸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폭풍우는 널 해치지 못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긴 의문을 남긴다. '폭풍우조차 널 해치지 못해.'라는 말과는 분명 어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삼키는 폭풍우도 아니라면, 섬사람들은 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분명 무언가에 무너지기도 할 텐데. 서사가 진행되는 내내 명확히 제시되지 않기에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주요 과제로 자리한다.
보이지 않는 것. 폭풍우보다도 맹렬한 힘으로 섬사람들을 해치려 들 것. 그것은 바로 균열이다. 더 정확히 하면 균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다 바위 같은 견고한 태도이다. 바뢰이 가족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 즉 폭풍우는 자신들을 헤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침전물이기도 하다.
첫번째 균열, 외지인
여행의 속성은 사실 '회귀'가 아닐까. 돌아올 곳이 있다는 전제하에 여행이란 행위가 성립된다. 과장하면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아무도 섬을 떠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섬은 곧 우주고 별은 눈 아래 풀 속에서 잠을 잔다. 하지만 간혹 섬을 떠나려고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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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뢰이 가족들이 꼭 그러하다. 섬을 떠나있을 때조차 섬 생각을 한다. 그들은 이미 섬의 정신을 완전히 공유하고 있고, 섬의 항상성과 일상성에 매료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완전히 탈문명한 가족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한스 바뢰이는 외부의 배들과 교류할 수 있는 부두를 만들고자 무던히 애를 쓴다. 바뢰이 섬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나 꽤 많은 외지인이 방문하는 곳이다. 이들은 모두 따뜻한 차와 다과를 제공 받고, 손님으로서의 대접에 만족스러운 시간을 향유하다 떠난다.
그들은 바뢰이 가족의 일상성에 금을 긋지 않는다. 오히려 한 계절을 머물다 떠나는 철새처럼, 겨울이면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익숙한 존재에 가깝다. 손님들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고, 바뢰이 섬으로의 여행은 회귀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분명한 변화를 보여준다. 마틴의 장례식 후 바뢰이 섬에 들른 다른 친척들은 무서울 정도로 섬의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랜 귀향에 신난 그들은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간의 회포를 풀어 놓는다.
잉그리드는 이들의 발자국을 뒤쫓으며 섬은 바뢰이 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부리 색을 살피는 게 지겨울 정도로 흔한 솜털오리도, 갈매기 알도, 때론 지긋지긋했던 폭풍우 역시 섬이 기꺼이 내어 준 것들일 뿐이다. 일상성 속에서 특수성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잉그리드의 균열은 여기서 시작된다.
어느 날, 교도소에서 탈출했다며 바뢰이 섬으로 침입한 외지인 사내는 가족들의 일상에 큰 균열을 그어 놓는다. 그는 바다와 섬에 대해 무지했으며, 마치 오래전 이 섬의 주인이라도 됐었다는 듯 먹을 것과 잠자리를 요구한다. 아무런 예고 없이 바뢰이 가족의 중심을 파고드는 그로 인해 그들의 일상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섬에서 빼앗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훔쳐 가거나 부서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방인은 그들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앗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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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앗아간 것은 섬이 유한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닐까. 폭풍우조차 쓰러트리지 못한 그 믿음을 너무도 간단히 가져간 외지인은 바뢰이 가족들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심고 떠난다. 섬은 더 이상 그들만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누군가 와서 주춧돌을 박고 지붕을 올렸을 뿐이다. 그게 바뢰이 가족이었다는 우연에서부터 균열은 태동했다.
자발적으로 부두를 만들어 외부와 교류하고자 했던 한스의 행위와 외지인의 등장은 분명 상이한 의미를 지닌다. 상자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스스로 숨을 쉬기 위한 목적으로 상자에 아주 작은 구멍을 내는 것과, 외부의 누군가가 상자를 마구잡이로 찢어발겨 그들의 맨살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발가벗겨진 그들에게 믿음은 바닷물보다도 유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수많은 비일상성을 겪고 있었다. 바브로의 섬 사람답지 않는 독특한 성격, 유난히 추워 바다 표면이 얼었던 겨울, 스웨덴 혼혈인 라스의 존재가 그러하다. 그들에게 낯설었던 이 특수성은 사실 바다와 섬의 입장에서 그저 차분한 일상성에 불과했다. 우주의 시선에서 보면 우리의 믿음은 갈매기 알만큼이나 작고 유약하다.
두 번째 균열, 시간과 죽음
시간은 흐르는 속성뿐 갖고 있지 않다. 아주 얇게 흐르는 시냇물이 결국 바위를 쪼개듯, 시간은 균열을 내는 가장 흔하고도 지겨운 소재이다. 그걸 버티는 것이 삶의 주가 된다. 소설 속에는 크게 두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할아버지 마틴과 아버지 한스의 죽음이다. 매일 똑같은 파도가 치는 섬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성장으로나마 아득하게 시간을 짐작했던 바뢰이 가족은 죽음을 통해서야 시간의 폭력성에 대해 배운다.
그러나 물리적인 죽음만을 살펴보기에는 소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렇게 피상적이지 않다. 잉그리드 역시 죽음을 겪었다. 그것은 유년의 죽음이다. 마틴에서 한스로 이어져 온 섬의 주인이라는 명찰은 곧 잉그리드의 가슴에 달린다. 아주 천천히 섬의 비일상성을 겪으며 성장한 잉그리드는 어른이 되고, 자신의 아빠와 할아버지가 견뎌왔을 '외부와의 싸움'을 직면한다.
섬사람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섬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섬을 떠나 숲이나 계곡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을 것이다. 섬사람들은 어두운 성향이 있어 두려움이 아니라 침통함에 빠져 버리기에 그런 상황이 오면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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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내민 복잡한 서류들에 압도되지 않고 하나씩 일을 처리하는 잉그리드에게는 폭풍우 속에서 두려워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은 부재해 있다. 서류를 정리하고 빚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그 과정에서 라스와 갈등을 벌였지만 망설임은 없다.
어릴 적 잉그리드에게 세상이란 섬과 그 밖의 것으로 나누어 졌다. 그러나 이제 잉그리드에게는 하브스테인에서 보낸 학창 시절의 기억이, 넬리를 비롯한 여타 아이들과 우정을 나눴던 경험이, 하녀로 일하며 얻은 새로운 시야가 존재한다. 잉그리드의 세계는 달라졌다. 이제는 잉그리드에게는 자신과 그 밖의 것이 존재한다. 그 무엇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을 주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완전한 섬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섬을, 섬이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균열의 아들 딸들은 섬에 산다
모두가 자신의 섬을 짓고 살아간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의로 부두를 열어주고 차를 대접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폭풍우를 불러내 쫓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건 부두 따위는 필요도 없다는 듯 해변을 가로질러 침입하는 외지인들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저 그가 섬을 망치고, 우리 자신을 망치는 것을 망연하게 바라본다.
섬은 오로지 나의 것이라는 믿음이 흐려지고, 나의 안과 밖의 것들이 무자비하게 섞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섬을 떠나지 않는다. 섬은 그 자체로 우리의 정체성이고, 삶의 터전이다. 변화를 맞이한 것은 나의 믿음과 생각뿐이지 섬 그 자체는 아니다. 균열이 가져오는 것은 균열 그 자체이지 멸망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섬사람이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지 않기에 의미가 있다. 섬의 주인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외지인인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씩 '볼 수 있음'의 상태로 변환하며 사는 수밖에. 바뢰이 가족의 잔잔한 삶이 아름다운 것은 이를 생생히 증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뢰이 섬이 본토와 유리되어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과는 아주 가깝게 맞붙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원문(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