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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Feb 24. 2022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영화 <소피의 세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내리는 일기만이 일상의 버팀목이었던 때가 있었다. 허나 내가 쓰는 일기들은 일상의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사건'이 결여되어 있다. 


대개 그날의 사유나 감정만을 덕지덕지 기워놓은 문장들은 단어의 덩어리일 뿐, 그날 내가 어떤 사건을 겪고 그러한 생각을 했는지, 어떤 음악을 듣고 무얼 먹고 누구와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남겨놓지 않은 형태이다. 그런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은 구태여 기록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었는지, 아니면 현실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박제해놓는 것이 괴로웠는지는 모르겠다. 간혹 그 작은 노트를 펴들면 일기라기 보다는 극도로 추상적이고 긴 서사시를 읽는 기분에 스며든다. 


 사진 찍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뭐든 좋은 것을 보면 카메라를 꺼내드는 것에도 작은 회의감을 가진 터라 기록에 열을 올리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나조차도 기록의 가치를 높이 산다. 과거의 기억을 추억이라는 여과 장치에 걸러내어 그것을 아주 조금씩 소비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기록은 생존 본능과도 같다. 누군가의 하루하루를 성실히 정렬해 놓은 블로그 포스팅을 보고 작성자가 이 기록들로 인해 그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된 생의 길목마다 '나'를 놔두었다고 믿어왔다. 내가 나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응시하고, 질책하고, 때로는 위로하고 또 헤아렸다고. 지금껏 그렇게만 살아왔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소피의 세계>는 나의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편린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세계로부터 떼어온 것임을 충만히 깨닫게 했다. 나의 세계는 수많은 '소피들의 세계'로부터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



 <소피의 세계>는 분명 느즈막한 온기를 품은 영화이지만, 어딘가 북촌의 가을만큼의 쓸쓸함도 안고 있다. 서울 북촌의 여행자 '소피', 그에게 기꺼이 잠자리를 내어준 호스트 '수영'과 '종구' 부부, 소피가 찾아 헤매는 '주호', 그리고 그의 친구 '조'는 각자의 이유로 북촌에 머무는 동시에 떠돈다. 


 종구와 수영 부부는 그 어느 때보다 고된 나날을 버텨내고 있다. 남편 종구의 어머니 건강 문제로 아끼던 보금자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듯 일상을 이어가지만 그 속에는 예민과 불안이 숨어 있다. 결혼한 사이인데도 여전히 서로를 '수영 씨', '종구 씨'로 높여 부르며 사랑하고 존중하던 둘은 점차 목소리 높여 싸우는 일이 잦아진다.



 북촌에서 중고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주호' 역시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에 일상이 버겁다. 그것은 '주호'의 영문 모를 태도가 어렵고 괴로운 그의 아내 역시 마찬가이지이다. 영화에서 처음 주호가 등장한 것은 수영과 종구가 함께 식사 중이던 치킨집이었는데, 아내를 향해 답답한 태도를 일관하고 윽박을 지르는 주호의 모습은 어쩐지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 그런 주호가 사실 소피의 생명을 구한, 소피만의 영웅이었다는 사실이 후에 등장하고, 이에 따라 주호는 묘한 입체성을 갖는 인물로 변모한다.


 과거에 소피와 함께 공부하던 '조'는 그와 북촌에서 재회한다. 그러나 조는 일 때문에 약속했던 시간을 충분히 함께하지 못하고 아쉽게 작별하는데, 대신 책과 편지를 선물해 소피를 웃음 짓게 한다. 둘의 대화 내용은 과거 회상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둘이 함께 나눌 '현재'가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매순간 자신을 지치게 하는 무거운 현실의 무게를, 묵직한 과거의 추억들로 꾹꾹 밟아 내려갈 수 있는 좋은 인연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들의 순탄치 않은 삶의 지점에 소피는 느즈막하게 머물렀다. 그리고 관찰자로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글로 써놓는 순간 특별해진다'는 그의 나레이션처럼 이들의 사진을 찍고 다정한 제3자의 시선으로 기록한다. 후에 수영이 소피의 블로그를 발견하고 종구와 함께 읽으며 '그땐 그랬지'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 것만으로 이 기록의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기록만이 생을 풍성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기록만큼이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나와 세상을, 또 타인을 부드럽게 연결해주는 것은 없을 지도 모르겠다. 소피가 서울 북촌에서 머무른 4일의 시간은 기록으로 남아 그 자신은 물론, 당시 그 풍경에 끼어 있던 수많은 이들의 세계를 보기 좋게 부풀린 것이다. 그 과정은 가히 일상의 기적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테다.


영화 <소피의 세계>를 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영화'라고 표현하고 싶다.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그때의 분위기, 소소한 사건들 모두 자연보다도 더 자연스러워 적잖이 놀랐다. 수영 역을 맡은 김새벽 배우님은 무대 인사를 통해 이 영화가 오랜 인연에게 '잘 지내?'하고 묻고 싶어지는 작품이라고 언급하셨는데, 이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인 '자연스러움'과 연결된다 느낀다.


'잘 지내'라고 묻고 싶어지는 영화, 과연 맞는 말이다. '잘 지내?'라는 한 마디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말은 없다. 그때는 당시 삶의 부침들에 온 신경을 박고 살아오던 나는 나의 시각에서만의 기억을 가진 채 굳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이 그에 대해 기록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에게 '나, 오늘 이걸 보고 네가 생각났어. 잘 지내?'라고 묻는 순간 비로소 기억이라는 이름의 그림은 하나의 조각이 된다. 삶의 작은 행복은 그로부터 기인한다. 마치 한 영화의 제작기를 모아 묶은 비하인드 컷을 보는 기분일 테지. 내 세계를 조각해준 수많은 관찰자들의 존재가 비로소 소중해진다.


 현실을 이루는 다수의 부자연스러움들이 슬퍼지는 요즘, <소피의 세계>는 소소한 일상의 기록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니,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지니지 않더라도 기록하는 자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묘하게 어긋나는 인연마저 어찌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 발화하는 따뜻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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