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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Mar 30. 2022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세상을 주세요

도서 <헬프 미 시스터>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의 2021년 조사에 따르면 따르면, 15세~69세의 중장년층 5만명을 대상으로 무작위 추출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플랫폼 노동자 인구는 66만1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취업자의 2.6%를 차지하는 규모이며, 2020년의 조사와 비교하면 1년 새에 약 3배가 증가한 격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급작스러운 증가는 분명 코로나19의 영향에 근간을 두고 있다. 실내 생활이 길어지면서 플랫폼 의존도는 높아졌고 이는 자연히 관련 직종 종사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러나 관련 산업이 빠르게 성장한 만큼 노동자 보호망에는 숭숭 구멍이 뚫린 것이 현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과로로 숨진 택배 기사, 배달 시간에 맞추려다 교통 사고로 사망한 배달 기사, 플랫폼을 통해 만나고 교류한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기 및 살인 범죄 등이 뉴스로 보도되는 상황이다.

 

 

 

법은 기술 발전을 비롯한 사회 현상을 따라가지 못한 채 지나치게 신중을 기하고, 때로는 늑장을 부리기까지 한다. 이 실태를 지켜보고 있으면 곧 이런 생각으로 이어진다. 


21세기에 왜 이런 노동이 존재하는 걸까. 최저임금과 복지혜택이라는 20새기 노동자의 고뇌는 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걸까.  -헬 프 미 시스터, p.251


소설 <헬프 미 시스터>는 플랫폼 노동자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조명한 세태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박힌 인물들이 무력한 쳇바퀴를 돌리는 모습만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언제든 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무해함의 가치를 진득히 간직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을 조금이나마 삶의 방향으로 밀어넣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에 속지 말아야 하며, 어떤 것을 지키고 싸워나가야 하는 지 깨닫게 한다.




 성인이 된 이후로 학업과 함께 쉬지 않고 일을 병행했다. 음식점 서빙 알바, 영어 강사, 촬영장 일, 재택 업무 등 다양한 직종은 아니더라도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만 일하는 경험은 꽤나 해보았다. 시큰한 어깨와 목에 시도때도 없이 긴장이 들어가는 것, 걸음이 불필요할 정도로 빨라지는 것, 버스 창에 바짝 볼을 붙이고 나의 쓰임새를 증명 받기 위해선 버터야 한다는 생각을 김 서린 유리 위로 찍어내는 것, 모두 '일'로 인해 생긴 버릇들이다. 


너도 알겠지만 누군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땐 말이야, 그 일이 맞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견딜 만하니까. 단지 그 이유로 계속하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수경은 속으로만 답했다. - 헬프 미 시스터, p.143


 내가 영위하는 것이 '삶'이 아니라 근근한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일상이 비참해진다. 둘의 차이는 꽤나 크다. <헬프 미 시스터>의 인물들이 그 비참함의 순간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노동의 순수한 가치가 상당수 흐려진 시대에 그것을 논하는 것이 지나친 낙관일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노동으로 삶과 존재를 채우고 싶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가 하는 일이 돈벌이 이상의 의미를 품기를 항시 바라게 된다. 


 그러나 약물 성범죄 미수 피해자인 수경, 그의 남편이자 선물거래로 연이어 실패를 거두는 우재, 시대의 뒷꽁무늬를 놓쳐 버렸다 느끼던 여숙과 천식, 빠르게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들 지후, 준후, 그리고 은지, 세상에 분노하는 순간마다 자신의 무력감을 실감하는 보라는 너무도 충실히 살아감에도 노동에서 '일' 그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삶이 고될 때, 세상이 나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굴 때 가장 먼저 타겟으로 삼게 되는 집단이 가족이고 친구이고 연인이다. 이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서사들 속에서 아주 폭력적인 형태로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서수 작가는 인간의 본성이니 악이니 하는 시시한 가치보다는 일명 '요지경'인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사랑으로 연민으로 서로를 껴안을 수 있는 인간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수경은 일하지 않는 우재를 나무라는 대신 트라우마를 애써 누르고 자신이 직접 일에 나서고, 보라는 그런 수경에게 무해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고, 준후는 은지의 그늘이 만드는 냉기를 꾸준히 사랑하며, 여숙은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나감으로써 살아 있는 용기를 제공해 나간다. 


 수경의 가족들은 모두 '좋은 세상'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기꺼이 좋은 세상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공해줄 세상이 그 어떤 결정도 과감히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싸우지 않고 그저 세태에 수긍하며 근근히 돈을 버는 거냐고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들은 사랑으로 가족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한 싸움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헬프 미 시스터>가 자극만 난무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빛나는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하지 않은 순간'들을 담담히 직조해냈기 때문이다.

 

 <헬프 미 시스터>의 결말을 절대 희망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수경의 가족은 이사를 결심했지만 15평의 빌라에서 조금 더 넓은 반지하로 이동하게 되었을 뿐이다. 가족들이 따뜻한 햇빛 아래 적당한 공간을 공유해가며 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다시금 직면했다. 


 배달 기사를 그만 두었지만 '헬프 미 시스터'라는 이름의 플랫폼에 또 다시 종속된 노동 기계가 되었다. 보라는 사랑하는 이들과 자신을 위해 계속 치열하게 날을 세워야만 하고, 은지는 아주 오래 준후의 사랑과 플랫폼의 그늘을 오가며 괴로울 것이며, 곧 청소년이 또 어른이 되어 갈 지후 역시 이상적인 의미의 '어른'으로서 기능할 수 없을 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부정의한 구조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며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 낙관을 부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있다. 사회 비판 칼럼이나 짤막한 뉴스 기사로 이 문제를 접했다면 잠깐의 분노와 안타까움이 일어나고 금세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휘발성이 강한 감정들을 날리며 '오늘도 나는 내 몫의 분노를 해냈어'라며 이기심을 부리게 될 지 모른다. 그러나 <헬프 미 시스터>는 해당 문제를 생생한 인물과 사건, 어딘가 익숙한 풍경들 속에 녹여내 오래 고민하고 싸워나갈 용기를 북돋아준다.  


수경의 가족이 '헬프 미'라고 말하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주고, 또 받을 수 있는 세상을 경험할 수 있기를, 오후의 햇볕을 즐기며 살 수 있기를, 그리고 나 역시 딱 그들의 삶만큼만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9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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