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앞이라면 나는 수많은 것들이 되고, 수많은 것들은 내가 됐다. A가 먼저 시동을 건다.
― 연구는 잘 되고 있나요?
― 아니, 다 망했어. 요즘은 그냥 다 회의감이 들어.
― 회의감?
― 응. 난 왜 내 곁의 수많은 인간들을 외면하고 멸시하면서 인간과 비슷한 무언가를 창조하려고 애쓸까. 진짜 인간들을 버리면서, 왜 가짜를 만들고 싶어 하냐는 말이야. 기어코 휴먼이 될 수 없는 휴머노이드를...
― 진짜들이 충분히 다정하지 못하니까, 우리는 다정의 샘이 마르지 않는 가짜라도 필요로 하니까요.
― 어쨌거나 그건 인간이 아니잖아.
― 나는 인간이 아닌가요?
― .......
― 정말로?
나는 웃음을 참으며 A를 바라본다. A의 눈에 빨간 안광이 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내가 그렸던 모습과 꼭 일치한다. 아니, 그 모습을 매번 A에게 일치시킨 것일 지도. A는 종이 뭉치를 바꿔 쥐고 두어 장을 넘긴다. 이후 능숙하게 막을 내리고, 새로운 빛깔과 질감의 커튼을 올린다.
― 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야?
― 뭐 하나가 제일 중요해지지 않는 삶이 나한테는 중요해.
― 또 그런다, 또.
― 진짜야. 뭐가 너무 중요해지면 겉잡을 수가 없어. 눈이 막, 그냥 돌아버려.
― 그냥 너 자신을 제일 중요시 여기면 안 돼?
― ......
― ......
― 안 돼, 네가 있는데 어떻게 그래.
푸흡. 왜 웃어. 야, 느끼해 죽겠다. 그런 말은 없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추가해야겠다. 나는 A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대거 뺏어 온다. 펜뚜껑을 열고, 그것을 대충 입에 물어 조악한 활자를 꾹꾹 눌러쓴다. A는 어이없어 하면서 웃고, 나도 웃는다. 그렇게 다시 조촐한 막이 내린다.
A는 내 글을 읽을 때마다 별안간 극중 등장인물의 대사를 입밖으로 내뱉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며 뭐냐고 반문하곤 했는데, 익숙해진 후로부터 내가 기억하는 상대의 대사를 성실히 쳐주었다. 그러다 보면 쓰인 바와 달리 대화가 산으로 가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배가 기어코 쓰임새를 반해 산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A는 항상 A가 아닌 무언가가 되어 주었고, 내 나약한 세계관 속 단단한 실체였으며, 나는 그와의 이 웃긴 역할극을 꽤나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 <컴온, 컴온> 속 제시를 보며 A가 떠오른 건 괜한 기시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9살 제시는 일명 '고아 놀이'를 즐기는 독특한 소년이다. 말하자면 엄마 비브를 상대로 역할극을 하는 것이다. 자신은 막 고아원에서 탈출한 가엾고 사연있는 아이이고, 엄마는 그를 받아주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어른의 역할을 해내면 된다.
후에 삼촌 조니와 함께 생활하게 될 때도 이 놀이는 중단되지 않는다. 장단을 맞춰주는 어른이 과거의 삶에 대해 물으면, 제시는 자신이 상상하는 고아의 삶을 충실히 재현해 답한다. 제시는 간혹 자신이 아닌 누군가, '타인'이 되길 기꺼이 자처한다. 타인과 자신이 틈없이 온전히 일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리다고 그 진리를 모르진 않는다. 누군가와 아무리 몸과 마음을 맞붙여도 바람이 드는 균열을 완전히 막을 순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다소 난해하다.
영화는 그런 제시만의 언어를 이해하는 조니의 지난한 노력들로 이뤄져 있다.
라디오 저널리스트인 조니는 전국을 돌며 아이들에게 그들의 삶과 행복, 미래에 대해 묻는 의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 부양에 대한 의견 차이로 한참을 서먹하게 지내온 여동생 비브와 세월의 우연에 의해 다시 교류하게 된다. 비브는 남편 간호 문제로 아들 제시를 두고 멀리 떠나야 하는 상황에 맞딱드리고, 그런 그를 위해 조니는 난생 처음 9살 조카의 보호자가 된다. 평생 혼자 살아온 조니에게 생의 동반자는 낯설기만 하다. 인터뷰를 통해 생판 처음 보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아도 조카 제시의 언행에는 영 적응을 못한다.
제시와 조니는 '지구인과 화성인의 합이 꼭 저렇겠지' 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둘은 근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조차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 언제든 고아가 될 수 있는 사람과 언제도 자기 자신일 수조차 없는 사람의 차이, 쉽게 잊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 등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연결될 수 있는, 서로의 존재에 틈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자신의 결핍을 소리로 채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제시가 제 몸만한 마이크를 들고 도시 곳곳을 거니는 장면은 그 자체로 영화의 정체성이라 느낀다. 제시가 조니의 세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질서가 부여되지 않은 소음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둘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언제든 서로의 존재를 충분히 듣고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갈등은 최종적 싸움이 아닌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비춰졌다. 차분한 흑백 톤과 자극 없는 서사에 더해져 영화를 보는 내내 현실의 불안감조차 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조니가 제시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면은 단연 가장 인상적이었다. 평생 다른 언어를 써왔던 그들이 비로소 그들만의 언어를 갖게 된 장면이었다. 제시는 조니의 말에 따라 마구 소리를 지르고 발을 쿵쿵 구르고 거센 욕설을 내뱉는다. 그렇게 해도 좋다는 스스로의 허락이 떨어진다.
제시의 마음에 웅크려 있던 작은 고아의 마음이 보다 더 적법한, 소통 가능한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은 큰 울림을 준다. 저렇게 차분히, 다소 삐걱거리더라도 솔직하게 서로의 존재를 감각하도록 허락했던 일이 언제였던가 하고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같은 은하계 속 존재라는 사실보다 지구인과 화성인으로서의 차이에 더욱 무게를 두며 사람들을 대해왔던 것 같다.
A와 나의 요상한 대화법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서로가 더욱 편해졌던 그 관계를. A를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컴온 컴온'을 외치고 싶다. 그를 재촉해 어서 내게 날것의 감정을, 생각들을 풀어놓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빈틈없이 너의 소리를 듣고 싶다고.
영화 <컴온, 컴온>을 보는 내내 행복했다. 질서 없이 퍼지는 아득한 메아리처럼, 나의 안에 끝없이 공명하는 소리를 남긴 이 작품을 언젠가 다시 꺼내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