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육쌍둥이> 리뷰
불은 타오른다. '타내린다'라는 표현은 ―허용될 수는 있더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닥불이 타는 이미지만 떠올려 봐도, 이 표현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불은 분명 종적인 방향성을 지닌다. 분노나 광기 같은 개념이 종종 '불 타오르다'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는데, 해당 감정이나 정서가 지닌 강력한 상승력을 감각하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도 중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땅은 무한한 타오름을 허락치 않는다. 불도, 불 같은 분노와 광기도 마찬가지이다. 타오름은 그 자체로 곤두박질 쳐지는 운명을 품은 개념 같이 느껴진다. 타오른 것은 꺼져 내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또한 천천히 열을 올려가는 것과 단번에 타올라 모든 것을 소진하고 마는 것 사이에는 넓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영원히 탈 수도, 영원히 오를 수도 없는 것.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은 붉은 기운과 열기로 기어코 피부에 불그죽죽한 공포의 흔적을 남기는 것. 그것이 불의 속성이다.
물로 꺼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묘하게 느껴진다. 타오르는 것은 결국 흘러 내리는 것을 이기지 못하는 건가. 불 같은 분노와 광기는 온도를 품고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이기지 못하는 건가. 이것이 연극 <육쌍둥이>를 관람하며 내가 굴린 생각이다.
연극 <육쌍둥이>는 '불' 그 자체는 물론 '불씨'에 대해 인상적으로 논하는 작품이다. 육쌍둥이의 욕심과 광기에 불을 지핀 '불씨'는 과연 무엇인지, 그 불씨에 기어코 불을 붙이고 만 것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이어진다. 앞서 설명한 불의 특성은 극의 배경이 되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절묘하게 맞물리는데, 특히 용산 참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짐작 가능하다. 연극이 끝으로 치닫게 되면 인물 개개인의 내면에서 외면으로 번져가는 불의 흔적도 발견하게 된다.
<육쌍둥이>의 대략적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2022년, 서울의 한 재개발 빌딩에서 불이 타오른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꺼지지 않던 그 불은 고물을 줍는 사내에게 옮겨 붙는다. 며칠 후, 사내는 몸이 붉게 달아오른 채 죽음을 맞이하고, 10년 전에 가출했던 육쌍둥이가 고물상을 찾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형식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독특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연극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았고, 불도 덜 꺼졌는데도 갑자기 무대 위로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어수선한 관객석은 아직 들어오고 자리를 잡는 이들로 가득한데도 두 배우는 고요히 타는 향불 하나를 들고 무대를 돌아 그것을 뒤쪽에 내려놓는다. 이 기묘한 의식이 끝나고 두 배우는 각자의 자리로 간다.
곧 코러스 장, 즉 '여인'의 독백을 프롤로그 삼아 그리스 비극보다도 비극적인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명확한 시작점을 찍어주지 않은 덕에 독립적으로 떨어져 공연되는 '극'이 아닌 삶에 침투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특히 코러스 장이 이끄는 코러스를 사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만을 독립적으로 연기하는 것 같다가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혈육으로 연결된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된 것은 그 때문이다. 마치 원시종합예술을 보는 듯 했다. 각자의 사연을 각자의 표현 방식에 담아 발화하는 인물들을 보는 건 그 자체로도 큰 즐거움이었다.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연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육쌍둥이는 얼굴이 똑같이 생겼지만 어린 나이에 가출하거나 입양을 가 너무도 다른 가치관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완전한 타인인 채 각자의 개성을 가감없이 드러내지만, 동시에 쌍둥이라는 독특한 태생으로 하나의 '덩어리'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를 동시에 표현하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배우들은 나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주었다. 많은 연극을 봐 왔지만 개중에서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지닌 정체성을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는, 뷔페 같은 작품이라 느낀다. 소리를 지르고 과장되게 연기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그들의 열정이 훅 끼쳐오는 기분을 느꼈다. 한 마디로 타오르는 불길처럼 관객의 마음에 화상을 입히는 연기들이었다. 특히 극 후반부에 얼굴에 붉은 칠을 더한 것을 신호탄으로 연기에 더욱 광기를 더해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연극 <육쌍둥이>는 분명 용산 망루 철거 사건과 같은 역사 속에 허무하게 묻혀버린 참상을 우리 앞에 생생히 꺼내 놓는다. 부당한 일에 대항하다 불길에 휩싸인 육쌍둥이의 아버지, 고물상은 그 자체로 사회의 피해자이지만 자식들에게는 분명한 가해를 해왔다.
여기서 또 선과 악의 모호함에 관해 논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 선인도 악인도 없는 상황에서 가해는 또 다른 가해를 낳게 된다. 아버지로 인해 유년의 상처를 품고 자란 육쌍둥이는 타인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내며 스스로의 상처난 마음을 보호하려 한다. 아버지가 남긴 노다지 땅이 이를 치유해줄 것이라 잠시 믿어보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동시에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까지 져버리게 하는 물질만능주의적 세태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꼬집는 작품이라 느낀다.
이러한 선과 악의 모순마저도 불을 닮았다.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불이지만, 우리는 불로 인한 불행을 수도 없이 목도해오지 않았나. (불 그 자체에 어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단순한 개념을 이처럼 다채롭게 변주해 하나의 서사로 품어낸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육쌍둥이>는 단조로운 삶에 익숙해진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선사해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