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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Dec 16. 2022

버리고 버려지는 것에 대해- 연극 <사월의 사원>

 객석이 무대 위에 있는 형태의 공연은 처음이었다. 입장과 동시에 무대 정측면을 둘러싼 관객 무리를 마주하고 당황한 탓에 걸음이 삐걱였다.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몰라 멈춰 선 나를 현장 스태프께서 안내해주셨다. 관객 입장에서 무대라는 금단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분은 실로 묘했다. 그렇게 첫줄 가장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한참 공간을 살폈다. 배우의 시야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빨갛게 각진 객석이 줄 지은 게 꼭 누군가의 치열 같다 생각하며 나는 막이 오르길 기다렸다.  


 '2021년 벽산문화상 희곡부문 당선작'이라는 홍보 문구만으로 연극 <사월의 사원>에 대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연극 <사월의 사원>은 기본적으로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근 그 수가 증가한 유사 가족 서사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다. 모친이 죽을 때까지 돌본 값으로 평생 살 수 있는 집을 얻게 된 영혜는 너무 넓은 집에 공허를 느끼고, 버려진 이들을 데려와 함께 살게 된다. 오래도록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지수, 편견과 차별의 무자비한 공격 속에서 연인마저 잃고 방황하는 해영, 이혼 후 변변찮은 소득으로 아들을 키우는 현주, 현주의 아들 기정까지. 한편 영혜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건너편에는 캄보디아의 고향 마을로 돌아간 인물 '메싸'의 서사가 흐른다. 


너무도 다른 아픔을 지닌 이들은 쉽게 융화되지 못한다. 함께 하는 식사 자리는 불편하고, 공통의 대화 주제를 찾기 버겁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적당히 벼린 말들은 예고없이 상대를 찌른다. 버려졌다는 공통의 처지만으로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이들의 아픔은 공감 능력보다는 방어 기제를 세우는데 특화되어 있다. 



 

동시대의 연대라는 건 때로는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닿기 어려운 무언가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거리 안에서는 그럼에도 낙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으며 이 이야기(사월의 사원)를 떠올렸다.
- 배해율 작가




비록 버려지는 것보다 버리는 감각에 익숙해지며 살아온 나이지만, 버려진 이들은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 느꼈다. 버린 주체에 대한 분노, 버려진 대상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그것이다. 어느 쪽이 더 존재감을 세우느냐, 어느 쪽이 더 강해지는 환경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결말이 달라진다. 영혜는 아마 후자에 힘을 실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버려진 객체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다시 주체의 위치로 끌어 올릴 방법을 고민한 것이다. 즉 자신을 버린 모친에 대한 분노를 누른 채 끝까지 돌봤고, 그 대가로 버려진 이들을 주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과 주체라는 명찰을 얻었다.  


그런 영혜가 극의 클라이막스, 모든 인물들이 집을 떠나 혼자가 되었을 때 쇼파에 기대어 하는 독백은 그렇기에 마음을 울린다. 다시 버려진 객체로 전락해버린 영혜는 말없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독백에서는 영혜답지 않은 날 선 말들이 쏟아진다. 아니, 원래 영혜는 그런 언어가 더 익숙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지수와 해영의 감상과는 다르게, 수다스러운 쪽이 진짜 영혜일 지도 모른다. 아니다, 애써 얻은 사람의 온기에 애써 수다스러움을 온 몸에 두른 것일 수도 있다. 알 수 없다. 버려진 이들이 그렇다. 내 어떤 특성의 원인이 버려짐에 있는지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태초의 나를 잃는다. 


영혜가 버려진 딸의 위치에 선 인물이라면, 메싸는 버린 엄마의 위치에 서 있다. 물론 메싸의 이 '버림'이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끝없는 가정폭력에, 가난에 시달렸던 전사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자신과 아들을 위해 한국으로 떠났지만 아들 수린의 입장에서 메싸는 충분히 버린 사람일 것이다. 버림이 버려짐을 낳는 이 연쇄 작용 속에서 아픔은 끝없이 재생산 된다. 메싸가 캄보디아에 도착했음에도 곧바로 마을로 향하지 못한 건 버린 사람의 죄책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메싸에게는 지수가 있다. 메싸와 지수는 극중에서 가장 단단한 유대관계를 확립한 듯 보인다. 둘 역시 각기 다른 아픔을 각기 다르게 보듬는 언어가 부족하기에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수는 메싸의 버림과 버려짐의 역학관계를 충분히 이해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핀치에 몰린 지수가 캄보디아까지 메싸를 보러 가는 장면에서, 사랑이라는 건 어쩌면 같음보다 다름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느꼈다. 둘은 이후에도 천천히 서로만의 언어로 아픔을 위로하고 다름을 보듬고 같음에 기뻐할 것이다. 


돌아보니 이들이 서로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은 적은 없다는 점에서 작가의 섬세함에 감탄했다. 그저 한 집에 산다고 해서 가족이 될 수는 없음을 너무도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일 테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라는 섣부른 관계적 정의가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영혜가 뜨개질 공방을 운영하고 있고, 인물들이 뜨개질을 하며 대화하는 장면으로 극이 시작되는 설정도 주목할 만하다. 서로 다른 실 가닥을 반복적으로 엮어내는 행위,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그 행위는 따뜻한 무언가로 결론 날 것이라는 기대로 시작되고 계속된다. 그러나 영혜가 해영에게 한 말처럼 너무 헐거워질 수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겨울이라는 때를 놓쳐버릴 수도, 무심코 잘못 끼운 코에 상당 양의 실을 도로 풀어야 할 수도 있을 테다. 뜨개질은 공동체를 갈구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온기를 원하면서도 배척하는 이들의 살아가려는 끝없는 노력을 은유하는 듯싶다. 어쨌거나 생의 어느 모퉁이에서 따뜻함을 마주칠 것을 기대하고, 이들은 실 가닥을 열심히 떠 나갈 것이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안타까웠고, 그저 허구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극이 마무리 될 때 쯤에는 여느 소설에서 읽은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수없이 버리고 버림 받을 모든 이들에게.


필요해.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필요해. (중략) "너는 달라. 너는 필요해."
- 정세랑, <피프티 피플 中>


연극을 보며 운 것은 처음이었다. 무대의 고요를 망치지 않도록 애써 눈물을 참는 몇몇 관객들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무대라는 고요한 지옥을 둘러싼 채, 완전한 타인이 되어 방관하는 듯했던 관객들이 마지막엔 울타리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의 삶을 단단히 지켜주고, 너무 어긋나지 않게 돌려 보내주고, 이런 삶들이 여기에 있다고 확실히 틀 지어 증명해주는 울타리가. 


 객석을 가로질러 퇴장하며, 계단 양 옆으로 메싸가 아들을 위해 가져온 선물들을 보았다. 그걸 천천히 굽어보며 올라오는데 허구의 이야기가 원색의 물감이 되어 현실의 삶에 끼얹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버리고 버려질 때, 남기고 남겨질 때, 남긴 메싸가 되고 남겨진 장난감이 되길 반복하는 삶 속에서 <사월의 사원>은 내게 꽤나 선명한 잔상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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