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범 Feb 15. 2023

그래도 산을 올라야지, 연극 <이백십일>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을 바탕으로 한 초연작이라는 소식에 마음이 끌렸다. 해당 소설을 읽은 적은 없지만, 특유의 전통적인 감수성과 생생한 대화 사이에 엿보이는 유쾌함, 탁월한 심리 묘사, 근대화 앞에서 몰락한 지식인의 모습 등을 통해 나쓰메 소세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그는 근대화를 마주한 당대 일본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세심히 그리곤 했다. 연극 <이백십일>은 그러한 작가의 뜻을 이어받은 듯 인물의 개성을 극대화하는 연출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선 무대 세팅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무대지만 공간을 알차게 사용했다는 느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다 소리가 울려 퍼지는 외딴 산중의 료칸이라는 배경이 썩 어울릴 만큼의 여백미가 있다는 게 묘했다. 여관을 형상화한 만큼 무대는 문을 사이에 두고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앞쪽 중앙에는 물이 담긴 욕탕이, 이를 둘러싼 가두리에는 길이 나 있는 형태였다. 뒤쪽에는 흰 천이 길게 늘어뜨려진 채로, 산 언저리에 걸린 아득한 안개를 연상케 했다. 


여관 한 쪽에는 두 청년, 게이와 로쿠가 묵고 있다. 게이는 호탕하고 긍정적인 청년으로, 우렁찬 발소리를 울리며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걷는다. 반면 로쿠는 굽은 등과 좁은 보폭으로 표상되는 소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유약하지만 다정해보이는 로쿠와 강인하고 호탕한 게이의 만담이 극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만담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로, 별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지만 해당 작품에서는 그 의미 없음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대화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인간 관계의 해체를 문제 삼곤 하는데, 두 청년의 일상적인 대화는 그 거대한 흐름에 떠밀리고 쓸려 나가더라도 일상적 대화와 주고 받는 안부만으로도 여전히 소소한 유대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증명 같았다. 


무엇보다 재밌었던 건 하녀와의 대화였다. '맥주는 없지만 아사히는 있습니다'라든가, 반숙을 해오라 했더니 계란 4개 중 2개만 삶아오는, 말 그대로 반만 삶아 온 해프닝 등은 옛날 만담쇼를 보는 듯한 그립고 유쾌한 기분을 자아냈다. 당연한 지식들에 무지한 하녀는 얼핏보면 도시의 세속에 물들지 않은 인물로 보이지만, 받아내야 할 것은 철저히 받아내는 근대적 얼굴 역시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입체성이 하녀라는 인물의 매력을 극대화시켰다 느낀다. 


로쿠와 게이가 극의 배경, 구마모토현의 해당 료칸을 찾은 이유는 아소산을 오르기 위해서이다. 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는 그저 '이백십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고 태풍이 불어닥치는 날씨에도, 용암이 녹아 흐르는 산에서 그들은 산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로쿠는 몇 번이고 돌아가자고 외치지만, 이런 날일수록 산을 올라야 한다는 게이의 말에 못 이기듯 따라 나서 결국 끝까지 산행을 마친다.  


이백십일이라는 이유 뿐인 이들의 산행은 의미를 알 수 없기까지 하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키워드를 연관지어 보면 열쇠가 보인다. 그 의미가 흐려져가는 잡절기(24절기를 제외한 나머지 절기)를 챙기고 기념하는 것부터가 근대적인 행위는 아니다. 유약한 맨몸과 단출한 짐만으로 거친 산을 오르는 그들은 웅크려 있던 젊음의 감각을 깨우고, 함께 역경을 헤친다는 인식에 유대감을 다진다. 산행의 목표는 산행 이전이 아니라 도중에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옆방에는 도련님이 머물고 있다. 그는 동경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쫓겨 고구마와 밤을 파는 장사꾼이 되었고, 이마저도 실패해 료칸에서 근근이 투숙을 이어가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추운 방에서 머물며 독한 감기까지 앓게 되어 지불해야 할 방세를 제때 지불하지 못했고, 극 후반에는 료칸에서 일하는 하인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하거나 정신적으로 병약해진 지식인을 곧 잘 다루곤 했기에, 그의 흔적을 가장 많이 엿볼 수 있는 캐릭터라고 느꼈다.  


그는 무력하다. 머리에 든 지식을 행동으로 꺼내놓는 일에 능숙하지 못하다. 게이와 로쿠 경우와는 달리 그에게 산은 그저 화산재로 시야를 막고 기온을 낮춰 감기를 불러 일으키는 성가신 배경에 불과하다. 배경을 기꺼이 풍경으로 만드는 게이, 로쿠와는 달리 도련님은 그저 료칸의 가장 추운 방 한 자락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후반에 료칸 심부름꾼이 된 그는 극 초반의 도련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모습이다. 


대사 하나 없이 무대를 느릿느릿 거니는 이도 있다. 료칸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아주 천천히 수염을 다듬고, 나뭇가지를 정리한다.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엿보이는 근대화의 파도에서 완전히 비껴난 인물처럼 보인다. 할아버지는 그 자체로 전통적 가치의 흔적을 보여준다. 인식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도처에 있는 느리고 그리운 것들을 표상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연극 이백십일은 '균열 속에 이미 무너지고 희미해진 인간성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주제로 하고 있다. 답은 고생스러운 산행을 마치고도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한 번의 산행을 결심한 게이와 로쿠의 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배경을 풍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근대화로 표상되는 변화와 균열을, 그저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배경으로 인식해 무력하게 주저앉지 않는 것이다. 비록 의미 없는 날갯짓이라도 힘차게 날개를 꺾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가셨던 아소산이라는 배경이 가까운 풍경이 되고, 반대로 나라는 주체가 그 풍경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산행이 지닌 의미이다.


 오랜만에 배우들과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서 즐거웠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도 연극으로 올려지면 좋겠다는 소망도 들었다.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3392

매거진의 이전글 버리고 버려지는 것에 대해- 연극 <사월의 사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