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 리뷰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사랑할 '나'가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사랑의 방향성은 '나'와 '너'의 경계가 흐려지는 쪽도, 하나가 되는 쪽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너'의 존중 덕에 더욱 확실한 '나'가 되어가고, '너'는 '나'의 지지 덕에 더욱 확실한 '너'가 되는 쪽이다. '나'는 '너'가 될 수 없고, 반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담담히 인식하며 서로가 서로임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선명해진 '나'와 '너'의 영역이 서로를 온전히 존중하며 '1+1=1'이 아닌, '1+1=2'라는 확실한 공식을 만들어 간다. 그게 건강한 사랑이다.
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를 관람한 후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주인공 '보이체크'의 불행이 이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나'를 잃은 그에게는 적법한 '너' 또한 얻을 수 없었고, 그의 사랑은 결국 파멸로 치닫는다. 물론 이 무지가 오로지 보이체크의 과오인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는 그를 얽매는 시스템의 폭력이 상존한다. 사랑하는 이들과 자신의 목숨을 단단히 쥐고 협박하는 집단이라는 이름의 악은 삶을 배울 여유 따위 허락하지 않았다.
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는 독일 희곡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의 미완성 희곡 <보이체크>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독일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희곡으로, 하층민의 불행을 통해 사회적 억압과 시스템의 폭력성을 폭로해 1890년대 등장할 사회극의 전조가 되었다고 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가난한 군인 보이체크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극단까지 몰아가는 내용이다. 사회 시스템에 억압받고 자신을 잃어버린 인물들이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결국 파국에 달하는 구조를 취한다.
우선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물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번째는 꽃이다. 보이체크는 카바레 가수인 마리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선물할 꽃 한 송이 사지 못하는 가난한 군인으로 등장한다. 때문에 그가 선택한 것은 직접 꽃을 심는 것이다. 이는 분명 그녀에게 구애하는 다른 남자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사랑 방식이다. 가진 것 없는 처지라도 정성과 노력, 시간을 들여 충실히 사랑하겠다는 의지처럼 보인다.
그 진심은 마리에게 닿기 충분했다. 마리 역시 자신의 진짜 모습은 궁금해하지 않는, 화려한 무대 위의 자신에게만 환호하는 가식적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서 마리가 내건 조건은 하나이다. 언제 어디서나, 마리가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것을 말이다. 보이체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이 꽃은 마리와 보이체크가 함께 가꾸는 꽃이 된다. 이때 꽃과 마리의 드레스 색깔로 표상되는 붉은색은 한 시절의 강렬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러나 붉은색은 곧 피의 색이기도 하다. 보이체크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마리를 찌르게 되었을 때,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 위로 붉은 피가 진하게 덧대여 가는 과정은 그렇기에 더욱 강렬한 이미지가 된다. 꽃이 곧 피를, 피가 곧 꽃을 품고 있다는 잔혹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두번째는 콩이다. 씨앗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콩은 두 남녀의 사랑의 시발점이 된다. 그러나 불행의 시작 역시 씨앗으로 표상된다. 극 초반에 마리에게 줄 꽃씨가 대위의 구둣발에 밟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훈련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보이체크가 얼차려를 받다 꽃씨를 들킨 것이다. 이때부터 콩은 불안한 전조의 싹이 된다.
마리와 보이체크 부부의 아이, 한젤이 병에 걸렸지만 의사를 볼 돈이 없는 상황에서 한계에 몰린 보이체크는 수상한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실험은 전쟁을 위한 감정이 제거된 인간 병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군의관은 마약류로 추측되는 '콩'을 먹이며 보이체크의 경과를 관찰하는데, 이 콩이 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콩이 피워낸 꽃 역시 화려한 향기와 색감으로 이 꽃의 시대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씹어 넘긴 콩은 그 어떤 꽃도 피울 수 없고, 보이체크의 폭력성을 부추기는 시발점이 될 뿐이었다.
마지막은 칼이다. 군의관의 실험에서 처음 칼을 쥐게 된 보이체크는 당나귀 한 마리 죽이지 못한다.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는 누구를 해하고 죽이는 데 재능이 없는, 사회의 관점에서는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콩'의 영향으로, 또 한젤이 죽어가는 극단적 상황의 영향으로 그는 칼에 익숙해지고자 온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결국 칼과 하나가 되는 데 성공한다. 보이체크가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고, 마리는 그걸 믿지 못하지만 보이체크가 살아남는 방법은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뿐이었다.
총과 달리 칼은 더 직접적인 무기이다. 살을 가르고 찢는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지기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고 해하는 것이 더욱 생생히 감각된다. 후에 이 칼로 마리를 찌르기도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의 사랑이 파멸로 끝나는 걸 온 몸으로 감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이건 모두 너의 과오이다'라고 말하는 음울한 속삭임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해설자로 등장하는 카를은 극 시작과 끝에서 보이체크의 이야기가 아주 흔한, 현재 일어나는 일들과 다를 것 없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시스템의 폭압 속에서 '나'를 잃어가고, 개인으로서의 행복을 파괴당하는 불행은 적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사회가 아닌 개인의 잘못으로 환원되고 비난 받는 경우도 도처에 가득하다. <보이체크 인 더 다크>는 전시 상황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었다. 고전 희곡을 바탕으로 한 만큼 플롯 전개가 조금은 뻔한 감이 없지 않았고, 상징물들 역시 너무 직관적이고 단순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이런 유사한 방식의 플롯으로 몇 번이고 재구성된 걸 본 오늘 날의 소비자들에게는 아쉬운 재해석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제한된 공간에서도 다채로운 연출 방식으로 표현의 다양성을 높였고 했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역량이 뛰어나 감탄하게 되었으며, 뮤지컬이 줄 수 있는 오락적 재미를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관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