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문외한인데다 그리 즐기지 않는 필자에게도 <시카고>는 매혹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영화 버전의 시카고를 흥미롭게 시청한 바 있기에 기대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1975년 브로드웨이 초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뮤지컬 <시카고>가 배우들의 호연과 중독성 있는 넘버들, 특유의 매혹적이고 재지(jazzy)한 분위기, 현재까지 유효하게 와닿는 신랄한 풍자를 품은 채 돌아왔다.
25주년 기념을 맞아 오리지널팀의 내한 공연을 접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었다. <시카고>가 지닌 고유의 무드를 보다 생생하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어로 공연되다 보니 자막을 함께 참고해야 하는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테다. 그러나 분위기에 따라 폰트와 크기를 조절하고 비속어 등을 생생히 살린 방식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자막은 작품 몰입을 방해하기 보다 자연스레 녹아 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카고>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192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주인공 록시가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감된 후, 변호사 빌리 플린을 만나 화려한 언론 플레이를 거쳐 스타로 거듭나는 과정의 지난한 갈등과 아이러니를 다룬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 자극과 흥미만을 찾아 구름떼처럼 몰려다니는 언론과 이를 비판없이 수용하는 대중들의 합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내는지 철저히 드러낸다. 모두 가면을 쓴 채 서로를 속고 속이고, 진실된 사랑과 꿈을 울부짖는 것은 순진하고 바보 같은 일이 되어버린 세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렇게 나열된 바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시카고>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범죄는 다양한 언론 플레이를 거쳐 하나의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언론은 자극적으로 서사화 가능한 사건에 초첨을 맞추며 대중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현실의 비극이 끝없이 탈구되고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사태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도해왔다. 1920년대 미국의 사회 문제가 현재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카고>가 오늘날 대중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면이 분명해진다.
무엇보다 기대했던 장면이자 가장 인상적이기도 했던 1막의 기자회견 파트는 탁월하게 연출되어 있다. 빌리가 록시의 유년시절부터 피해자와의 관계, 사건 전후의 맥락, 범죄 동기까지 꾸며내는 모습을 생생히 하기 위해 록시는 입만 뻐끔대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연기된다. 복화술로 록시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빌리는 진술이 끝나고 나면 뻔뻔하게 변호사 역할로 돌아와 '이해할 만하다'라고 반복해서 노래한다. 그들을 둘러싼 기자들은 사건의 진상을 바로 보아야 하는 언론인의 의무를 져버린 채 마치 유명 배우를 인터뷰하듯 가볍고 흥미 위주의 질문만 던져댄다. 결국 기자회견은 그 본질을 잃고 함께 무아지경으로 춤을 춰대는 하나의 쇼로 마무리 되어버린다.
극이 진행될 수록 록시가 원하던 스타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란 사실은 자명해진다. 애초에 록시의 이전에는 벨마가 있었다. 벨마를 비롯한 여섯 명의 여성 수감자들이 '셀 블록 탱고'를 부르는 장면은 범죄자들의 진술이라기 보다는 스타를 선별하기 위한 오디션처럼 보인다. '이 중 가장 자극적이고 잘 팔릴만한 이야기를 골라주세요'하는 식의 어필 말이다. 결국 빌리와 마마의 도움이 더해져 선정된 이는 벨마였고, 벨마 역시 스타의 꿈에 차서 승승장구 하나 싶었지만 몇 개월도 가지 못하는 유명세였음을 깨닫는다. 록시의 이전에 벨마가 있었듯, 록시 역시 누군가의 이전이 되어 간다.
2막의 재판 장면 역시 압도적이었다. 임신까지 한 록시를 버리는 무자비한 남편 역할을 자처하도록 에이모스를 이끈 후, '그녀에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화룡정점으로 변호를 마친 빌리는 당당해 보인다. 재판은 그 엄숙함을 잃는다. 그 자체로 하나의 뮤지컬 공연처럼 유흥이자 드라마의 장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빌리가 부르는 <Razzle-Dazzle>은 '야단법석'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재판을 진실이 탈색된 하나의 쇼비즈니스로 만들고 야단법석 떠는 사람들의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려는 그의 연출은 너무나 수월하게 성공한다. 그가 변호하는 여성들과 다르게 빌리는 자신의 위치와 명예를 비교적 오래, 또 쉽게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같은 쇼비즈니스 안에서도 위계와 서열의 선은 명확히 그이는 것이다.
벨마와 록시가 함께 공연을 하는 결말은 그 무엇도 변함이 없는 현재를 보여주는 듯싶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춤을 추는 두 여성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적법한 대가를 치렀다고 보기 어렵다. 여전히 쇼비즈니스의 미끼이자 낚시꾼을 자처하며 섞여들고, 그 일회적인 자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뒤에는 언제나 몰락이 기다리고 있고, 사회는 개선의 가능성조차 버린 채 평화로운 척 굴러간다.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에도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던 구성과 연출, 연기에 혼이 빠진 느낌이었다. 끝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특히나 훌륭했는데, 공연의 맛과 분위기를 살리는 또 다른 주역이라 느꼈다. 화려한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와중에도 연주자들에게 자꾸만 시선이 갈 정도였다. 재즈의 시대를 다루는 작품 답게 음악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확인했다. 배우들의 신호가 있을 때마다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오케스트라에게 박수를 보냈다.
뮤지컬 관람 경험이 적은 관객이라도 <시카고>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하리라 믿는다. 8월 6일까지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진행되는 오리지널 내한 공연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