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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Apr 24. 2023

물렁해지는 땅 위에 휘청대며- 연극 <몬순>

숨 쉬며 살아가는 일 자체가 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먹는 한 끼 식사는 누군가를 착취함으로써, 누군가를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차려지고 내가 소비하는 사소한 물건이나 서비스 역시 누군가의 불합리한 희생과 삶을 갈아 넣은 것일지 모른다. 생존 자체가 착취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매순간 깨닫다가도 어느 순간 잊어버린다.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해내고 다시 괴로움에 굴레에 빠진다. 그러나 무얼 해야 할 지는 알 수 없다. 


이 땅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그 연결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주 작게라도 움직인다면 그물은 떨리고 누군가를 흔든다. 날숨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마저 해롭게 느껴진다면 생각의 고리를 끊어낼 방법은 없다. 그저 술이나 잔뜩 퍼 마시는 등의 한심한 방식으로나마 자신을 잠시 생각할 수 없는 상태로 끌어내린다. 초연결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건 그런 거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은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고, 나의 영향력과 미약함을 동시에 감지하며 끝없는 무력의 굴레로 빠진다. 무얼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생각하기를 멈춘다. 


연극 <몬순>은 그런 초연결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는 명작이다. 이렇게 생각의 고리 끝에서 결국 무력에만 잠겨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나를, 우리를 자극한다. 가상 국가 세 곳과 9명의 인물을 교차시키는 인상적인 형식으로 전쟁의 영향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계절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비를 동반하는 계절풍 '몬순'과 전쟁의 전지구적 특성이 절묘히 맞닿은 이 작품은 전쟁을 어딘가 먼 땅에서만 일어나는 게임처럼 느끼는 우리에게 '지금, 여기, 바로'라는 감각을 심어준다. 


A국에는 다국적 기업 몬순의 직원 차미와 그의 아들 굴, 그리고 이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유학생 네이지가 살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타트에서 가족들의 노력으로 평화로운 A국에 자리 잡은 네이지지만, 언제나 화상 통화를 걸어 타트의 상황을 확인한다. 유학을 온 뒤에도 발 뻗고 편히 자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B국에는 미디어아트 졸업 전시를 준비하는 대학원생 새벽이 있다. 그는 전쟁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저곳을 여행 중인 사진 작가 '이삭'과 소식을 주고 받는다. 전시 주제인 '전쟁'과 관련해 인터뷰를 돌던 새벽은 학부생이자 같은 강의를 도강 중인 타트 유학생, 코우쉬코지를 만난다. 새벽은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젝트의 무게가 마냥 가볍지 않음을 느끼고 어떠한 한계에 부딪힌다. 


마지막으로 C국에서는 세 친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랜 전쟁을 치르고 있는 D국으로부터 망명한 홀키는 퀴어 페스티벌을 위해 공연을 준비하는 유치원 교사 리오와 무용수 문을 지켜본다. 둘은 애정 깊은 오랜 커플이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피하지 못한다. 


전혀 다른 곳에, 다른 서사를 지닌 채 살아가는 이들은 무대 위에서 자꾸만 엮이고 연결된다. 각 국가에는 전쟁의 상흔을 입은, 혹은 그로부터 도망친 인물과 전쟁이라고는 미디어로밖에 접해본 적 없는 이와의 만남이 일어난다. 전쟁은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의 일상으로라도 어떻게든 파고드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이자 무기 회사에서 일하는 차미는 아픔이라곤 모른 채 승승장구 한 것처럼 보이지만, 타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악착같이 그 사실과 차별, 가난 등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며 상처의 치유를 미뤄왔던 인물이다. 리오는 애인 문에게 아낌 없는 지지와 사랑을 보내지만서도 두껍게 축적된 소수자성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문의 모습에 슬퍼하기도, 갈등하기도 한다.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현해야 할 지 고민하는 대학원생 새벽 역시 변화를 맞이한다. 전쟁이란 그저 졸업 작품의 주제로 남았던 그에게 코우시코지의 등장은 새로운 바람을 불어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코우시코지는 태평하고 여유로운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 성격마저도 타트인으로서 언제나 주변부에 머물러온 인물이 나름대로 적응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도 전쟁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아픔이 나의 집에, 나의 공간에도 속속들이 침투함을 느낀다. '나'와 '너'의 경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그 나라'와 '내 나라'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우리는 우리가 딛고 선 땅이 끝없이 물렁해짐을 느끼며 휘청댄다. 


<몬순>은 미디어 아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영상과 무대의 조화를 시도한 작품이기도 하다. TV로 인식되는 화면과 소리는 이러한 영상 매체가 우리 삶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는지, 또 그 자체로 인공 자연을 형성했음을 실감하게 한다. 실시간 화상 수업, 화상 통화, 3D 게임 영상 등은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구현으로 인식의 틀을 크게 바꾸어 놓곤 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영향력을 무대 속에 녹여내 전쟁의 속성과 그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중 타트의 상황이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 없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화상 통화나 인물들의 발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는 우리가 전쟁을 인식하거나 소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몬순>은 예술의 재현 문제 역시 빠짐 없이 다룬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기도 했던 건 문과 리오가 퀴어 페스티벌에서 공연할 2인극을 연습하는 장면이었다. 둘이 추구하는 방향성은 확실히 갈린다. 문은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그 순간을 그대로, 가감없이 묘사하길 바란다. 반대로 리오는 그 과정을 가짜로라도 되풀이 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 페스티벌인 만큼 즐겁고 신나는 장면을 묘사해 치유를 도모하는 쪽이 옳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사실적인 재현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말이다. 


예술가에게 있어 이 둘 사이의 갈등은 언제나 첨예하다.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충실히 재현할 것인지 재현보다는 치유와 위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다. 명확한 답을 던져주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고민을 계속해서 해나가야 한다는 메시지 만큼은 확실하다. 고민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무력에 몸을 웅크린 채 의미없는 시간을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 다치고 죽고 삶을 포기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유리 괴물의 파편처럼 쏟아지는, 아래서 위로 떨어지는 미사일 이상의 폭풍을 몰고 오는 전쟁과 여타 비극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해나가야 할까. 이 작품은 그 작은 사고의 변화로부터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연극 <몬순>은 참 시의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단비 같은 작품이다. 5월 7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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