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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Jun 19. 2023

비인간을 확장해가는 방식

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 리뷰

 '비인간'은 의미의 개량적 변화를 겪고 있는 대표적인 단어라고 느낀다. 오래도록 '비인간적'이란 표현은 '사람답지 않다'는 뜻으로 점잖은 비난이자 욕으로 인식됐다. 사람다움에 꽤나 숭고한 가치를 부여해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비인간'은 단순히 인간이 아닌 것들을 넓게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역시나 인간 중심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가 그늘져 있던 존재들에게 미약하게나마 빛을 비추는 방향으로 개량되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비인간'이란 단어가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분야는 과학이다. 특히 인공지능로봇 A.I의 등장은 비인간의 개념을 완성하고, 인간과의 경계와 어울려 사는 삶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걸쳐 있는 존재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문학, 영화 등의 예술 장르에서도 중요한 담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늦게나마 연극도 이 주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듯싶다. 특히 최근만큼 다양한 종류의 SF 연극이 제작되는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제44회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 역시 다양한 연극적 도전을 바탕으로 비인간의 존재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2060년경의 근미래, 끝없이 반복되는 기후위기와 펜데믹 상황 속에서 세계는 인공지능로봇의 통제 하에 놓이고, 총 세 구역으로 나눠진다. 비교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1구역,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모인 네크를 포함한 2구역, 무법지대와도 같은 3구역이 그곳이다. 주인공 '이나'는 사랑하는 반려 앵무 '바'를 빼앗아 간 국가를 혐오하며 3구역으로 향하고, 국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친 자아를 지닌 인공지능로봇 '지니'를 만난다. 절망적인 세계관 속에서 점차 서로만을 의지하게 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국가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큰 갈등을 맞이한다.  


SF 연극에 있어 가장 큰 난점은 무대 세팅이지 않을까 싶다. 비현실적인 공간을 재현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묘사의 제한이 없는 문학이나 영상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화와 달리 연극은 제한된 공간과 무대장치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은 이를 아주 창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했다. 무대 측면에 스크린을 배치하고, 무대 상황과 동일하게 세팅한 레고 블록을 라이브로 촬영해 스크린에 띄운다. 또 배우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서로를 촬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무대 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낯선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기계가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는 미래사회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효과를 지니기도 한다. 또한 CCTV 등으로 표상되는 감시 체계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철근 구조물을 기준으로 뒤쪽에서 레고 세팅을 담당하는 배우들은 주인공들의 배후에 언제나 감시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기도 했다.  


또한 레고로 이뤄진 스크린 속 세계는 꼭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환상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플레이어가 되고, 이는 오히려 지나친 감정적 몰입을 방지해 무대 위의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이나와 지니의 이야기는 더 이상 픽션 속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품은 충분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비인간의 존재, 그들과 함께하는 삶, 나아가 그들을 가족으로, 또 연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 등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게 하는 독특한 무대 장치였다. 


'지니'의 설정도 인상적이다. 지니는 동물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이다. 비인간의 대표격인 그는 또 다른 비인간, 동물을 소통의 대상으로 삼는다. 소통이 가능해지는 순간, 원시적인 동물은 뛰어난 과학기술의 산물인 인공지능 로봇과 동일한 층위에 서게 된다. 은연 중에 인간과 비인간을, 또 비인간 내에서도 어떤 존재들 사이의 우열을 나누는 인간의 태도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해서도 진중하게 다루고 있다. 어떤 존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어쩌면 각 개체에 맞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새에게는 넓고 파란 하늘이, 물고기에게는 깊고 푸른 물이 필요한 것처럼 각 개체는 자신만의 삶의 조건, 행복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나와 지니의 갈등은, 인간이 비인간이라는 낯선 존재 앞에서 그에 맞는 사랑을 고르고 제공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일 테다.  


이는 이나와 바 사이의 사랑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이나는 바를 가족으로서 진실로 사랑했지만, 그와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지니만큼 그의 욕구를 충족해주지는 못한 듯싶다. 그러나 이나는 새가 먹던 사과를 거리낌 없이 먹는 인물이기도 하다. 비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어진 짙은 경계를 자신의 의지로 지울 수 있는 인간이다. 이나의 끝없는 고군분투는 소통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 작은 창구를 통해서나마 애써 소통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한다. 


러닝 타임 내내 온전히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배우들의 호연, 창의적인 연출 방식, 영상 예술과 무대 예술의 조화,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룬 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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