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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Jul 15. 2023

거짓말을 넘어 비밀로 - 영화 <비밀의 언덕>

 어릴 적 엄마에게 가장 크게 혼났던 건 거짓말을 들켰을 때였다. '엄마는 거짓말이 가장 싫어!'라는 말과함께 그것의 비윤리성을 머리로는 철저히 이해하면서도 그걸 반증하는 현실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의 청소년기는 꽤나 어지러웠다.  


돌아보면 나의 성장 역시 거짓말을 넘어 비밀의 언덕으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었다. 대부분의 거짓말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그러나 비밀을 덮은 거짓말이라는 이름의 검은 천은 작은 바람에도 펄럭여 그 아래의 속살을 허락했다. 날이 갈수록 크고 두껍고 촘촘해져야만 하는 천을 짜는 건 어린 나에게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나만의 기억이 아닐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거짓말이 통하고, 간혹 필요한 상황들을 배웠던 것 같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더욱 솔직해지기 위해 때로는 거짓을 섞어 쓰고, 그를 통해 욕구가 뚫은 커다란 구멍에 자그마한 구슬들을 채워 넣는 일로 내가 온전해질 것이라 믿었다.  


영화 <비밀의 언덕>은 그 어지러운 10대 소녀들의 마음들을 생생히 재현한 작품이다. 꼭 나를 닮은 12살 명은의 눈을 빌려 그 시기의 심리와 고민, 삶의 부침들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공감성 수치에 몸을 뒤틀게 할 만큼 생생하고, 명은과 같은 10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것에 대한 반가움과 감사를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영화 <비밀의 언덕>은 장편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빛나는 성취를 보여준다. 제72회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됨은 물론 기타 국내 영화제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5학년 초등학생 '명은'이 가정과 학교에서 여러 갈등을 겪고 글쓰기를 통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마주하는 이야기는 유독 특별하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던 내가 떠올라서였고, 이와 관련한 인정 욕구에 시달려온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유년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에만 젖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뜻한 색감과 정겨운 장소들은 경험해본 적 없는 시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명은의 세계에 더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집과 학교라는 이름의 따스함을 가장한 차가운 현실이다. 어린이들에게 세상은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처음 경험하게 하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오히려 냉담하고 가감없는 이 방식이 과거를 재현하는 데 큰 설득력을 더해주었다. 


명은은 입체적인 인물이다. 어린이만큼 입체적인 존재도 없다는 점에서 이는 어린이에 대한 충분한 관찰과 존중이 담긴 반가운 캐릭터로 읽혔다. 똑똑하며 당돌하고 거침없는 모습은 박수와 존중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멋지다. 반대로 솔직하고 유약하며 풍부한 감수성을 품은 모습은 더없이 사랑스럽다. 명은이 겪는 어려움은 자신의 이 다양한 면모 사이에서의 갈등과 맞닿아 있다.


12살 명은의 눈으로 본 가족은 '물음표'이다. 책과 글쓰기를 사랑하게 된 소녀답게 가족을 문장부호로 표현한 부분이 재밌었다. 명은은 시장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감추기 위해 새 가족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란듯 이야기하고, 증거까지 마련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짠 검은 천은 펄럭거리다 못해 날아가버린다. 그런 명은은 돌아가신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쓴다. 이는 자신이 본 가족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낸 글이자, 처음으로 거짓이라는 무기를 버린 채 스스로 속살을 내비친 글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명은의 이 솔직함은 그에 맞는 보상을 얻었다. 시에서 주관하는 큰 백일장에서 대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은은 대상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다. 만약 거짓된 글을 버리고 솔직하게 쓴 글을 칭찬하며 대상을 거머쥔 채 웃는 명은으로 끝을 냈다면, <비밀의 언덕>은 평면적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명은은 어쩌면 다시 거짓으로 그 솔직함을 덮는다. 시장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신문에 실린 명은의 장려상 글, 솔직함이 조금은 잘려나갈 글을 보며 활짝 웃는다. 그것을 자신의 오랜 꿈인 멋진 집들의 사진 옆에 스크랩한다. 거짓으로 인한 해피엔딩이다. 


입고 싶었던 원피스를 입고, 장려상을 안고도 활짝 웃으며 시장으로 달려가는 명은의 모습이 오래 잊히지 않는다.  


어린이 입장에서 거짓말은 참 묘한 존재이다.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거짓말이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과 반대로 훨씬 나은 결과를 낳는 상황을 모두 목격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타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은 정말 틀리지 않았다. 10대에 진입한 명은은 점차 거짓말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 갈 것이다. 그렇다면 명은은 여전히 거짓말의 세계에 머물러 그것의 어쩔 수 없음을 통해 자위하는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거짓말을 넘어 비밀의 언덕에 진입한 명은의 앞에는 또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솔직한 마음들이다. 언덕 너머에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실만으로도, 솔직한 마음들을 그때그때 부려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조금씩의 눈맞춤을 허락하는 것만으로도 명은은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이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비밀의 언덕>은 좋은 글쓰기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영화 중반부, 명은의 학교로 전학온 혜진과 하얀 쌍둥이는 명은의 글쓰기 라이벌이 된다. 그들은 몇 번이나 명은보다 높은 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쌍둥이가 쓴 글이 심상치 않다. 자신들은 실제 쌍둥이가 아니라는 것, 어머니의 직업 때문에 지금껏 받아온 멸시,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다짐 등이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사랑 받을 수 있는 이야기는 솔직한 이야기, 거짓이라는 기교를 쓰지 않은 이야기인 것일까. 


좋은 글은 '솔직한 글'이라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라온 우리이다. 실제로 솔직함은 큰 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솔직함을 조금 가쪽에 치워둔 채, 어른들이 원하는 순수한 어린이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명은의 시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혜진과 하얀이 택한 솔직함은 오히려 어른의 세계를 깊이 엿본 이들의 선택이며, 명은이 선택한 순수함은 어린이됨에 부흥하는 그것이다. 


<비밀의 언덕>은 재관람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다. 덮고 묻기에 바빴던 10대 초반의 나의 모습을 조금은 솔직하게 마주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놓치지 않고 관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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