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
영웅 서사는 그 장르적 관습을 꾸준히 지켜온 덕분에 일정 수준의 관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전 설화에서부터 이어진 클리셰에 대중은 지치기 마련이고, 새로운 영웅을 바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개천의 잠룡으로 태어난 주인공이 조력자를 만나고, 기성 카르텔의 압박에 짓눌리고, 특정 계기를 통해 비범한 능력을 폭발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시스템을 부수고는 종국에 사회적으로 보은한다는 구성은 서사적으로 안전하지만 어딘가 허무한 면이 있다.
영웅의 조건이 비범한 출생도, 난세도 아닌 '스스로 영웅됨의 선언'이라면 어떨까. 조금은 흥미가 돋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다소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러한 '자칭 영웅'이, 그동안 관련 서사에서 꾸준히 배제되고 타자화되었던 '여성'이라면. '태어난 영웅'이 아니라 단단한 주체 위에 '선언된 영웅'을 목격하는 체험은 분명 신선하다. 이에 구미가 당긴다면 필시 창작집단 LAS의 신작 레파토리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을 관람하기 바란다.
'우투리 설화', 또는 '아기장수 우투리'로 잘 알려진 이야기는 고전 설화가 흔히 취하고 있는 영웅적 일대기를 다소 벗어난다. 영웅은 무릇 모든 고난을 겪은 끝에 기존 체제를 뒤엎고 이상 세계를 건설하지만, 우투리 설화의 장수 우투리는 '개혁에 실패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난세에 영웅의 출현을 바라는 민중들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는 동시에,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체념이 서려있지 않나 싶다.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은 우투리 설화를 디스토피아적으로 해석한 독특한 작품이다. 새롭게 구성된 세계관은 중앙 도시와 다섯 개의 변방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변방 도시 출신의 5명의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중앙의 무자비한 침탈에 대항한다. 주인공 5명은 그렇다 할 명명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저 죄수 번호를 부여 받듯, 숫자로 된 이름을 안고 꿋꿋히 생을 이끈다.
연극은 원작 설화 우투리에서 날개 달린 영웅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결말의 모호함 또한 차용했다. 실제로 '우투리 설화'는 구전되어 온 만큼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명확히 고증된 결말이 없다.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은 이를 변형한 세계관에 맞게 적용했고, 주인공이자 영웅인 3의 마지막 총구가 어디로 향했는 지를 확정짓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흔히 '열린 결말'이라고 일컬어지는 맺음 방식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결말을 완전히 닫았다고 느꼈다. 배우들이 결말의 모호함을 알리는 순간 혁명의 성공 여부, 3의 총이 끝내 쓰러트린 것, 체제의 전복 가능성 등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제야 이 서사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영웅의 환상성을 깨부수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 여부였음을 깨달았다. 누구의 손가락에 방아쇠를 걸어줄 것인 지가 문제였던 것이다.
영웅은 무릇 불의의 희생자들을 구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지만, 이 작품에서 만큼은 다르다. 영웅 3이 그 자체로 재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영웅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고, 이 극의 큰 매력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의문점은 여기서 또 한 번 옮겨간다.
영웅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정의로운 인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제각각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 또한 절대적이지 않음을 실감한다. 실제로 극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갈등은 1과 3의 관계에서 비롯되는데,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1의 입장과 '누구의 희생도 불가피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3의 입장이 충돌하는 식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끊이질 않는 공리주의 논쟁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했다.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범인인 우리는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렇다면 영웅은 어떤 선택을 할까. 조금은 비범할까.
철저히 이상을 꿈꾸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영웅인 3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지만, 극 중 배경이 전쟁 상황임을 고려했을 때 1의 주장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모닥불을 활활 태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장작을 넣어 주어야 한다. 무언가가 타오를 때, 무언가는 분명 그 불길에 잡아 먹혀야만 하는 것이다. 피 흘리지 않는 전복이 존재했던 적이 없다는 것은, 역사를 조금만 돌아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극에 등장하는 5명 모두가 3의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제로 베이스에서부터 저항군을 조직해 돌파구를 마련한 1, 진실한 우정과 쉽게 휘발되지 않는 단단한 삶을 일러준 4, 그를 진심으로 아끼며 감옥에서 풀어준 5, 언제나 그가 돌아올 곳을 마련해 놓던 2 모두 단순히 '조력자'라고 일컫기엔 부족한 3의 영웅들이다.
영웅을 잉태하는 것은 알도, 난세도 아니다. 수많은 강줄기가 만나 바다가 되는 것처럼, 영웅들이 모여 영웅을 낳는다. 그들이 조용히 그려오던 궤적은 특별한 상황과 관계를 만나 선명한 균열을 긋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세상에 조금씩 금이 간다. 3은 그들이 오래도록 내고 있던 금 위로 돌을 던져 마침내 완전히 산산조각을 낸 인물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은 분명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모두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마치 찬 물과 더운 물에 번갈아 몸 담그듯, 극에 몰입하다가도 나레이터 역할을 자처하는 배우들을 통해 소격 효과를 느끼기를 반복했다. 이는 연극의 현장성이 더해져 분명 독특한 체험으로 다가왔다.
또한 스스로의 영웅됨을 선언하는, 영웅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개척해가는 주인공으로서의 여성 캐릭터 역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출가하는 남성 영웅과 그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여성 구도의 고루함을 시원하게 깨 부순 작품이라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위에 언급한 다양한 사유들과 더불어, 고전을 재해석하며 그 명목을 잇는 동시에 한계는 부수는 것이 예술가들의 과업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작품이다. 꼭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원문(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