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몸들을 따라- 연극 <맆소녀> 리뷰

연극 <맆소녀> 리뷰

by 래범

'몸은 기억한다'라는 유구한 말이 있다. 나 역시 이 말을 교훈처럼 들으며 자랐다. 오랜만에 자전거에 올라 탔을 때도, 오랜만에 배드민턴 채를 잡았을 때도, 물에 발을 담갔을 때도 '몸은 기억한다'라는 말이 내게 약간의 용기를 주었다. 이성적 사고가 야기하는 두려움을 잠시 밀어두고 몸의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조금은 자신감이 붙곤 했다. 그러나 이 말이 때로는 아주 무서운 사실로 다가오기도 한다.


몸이 생각보다 많은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프도록 실감한 적 있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굳어버리는 상황들. 특히 트라우마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기억은 머리가 아닌 사지 끝부터 되살아나며 전신을 돌처럼 굳혀버린다. 다 잊고 해소한 줄 알았던 기억들은 사실 여전히 나를 붙잡고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는 탈락감이 퍼진다. 그러나 반대로 알고 있다. 이는 철저히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라는 걸. 세포가 품은 기억은 그토록 즉각적이고 무서워서 나의 안녕과 온전함을 위해, 빠른 균형 회복을 위해 나조차 예상치 못했던 행동을 한다. 침묵이 대답이 될 수 있듯, 움직이지 않음(혹은 못함)은 하나의 처절한 몸짓이 될 수 있다.


연극 <맆소녀: The Silent One>는 이 사실을 아프게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기억하는 몸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얽히기도, 마침대 연대하기도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해당 극의 연출가는 '몸과 몸이 연대'하며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그 의도를 전했다. 연극은 말이 아닌 몸짓으로, 생각이 아닌 감각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최고의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엇보다 인상적인 관람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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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한다. NGO 활동의 일환으로 소아과 의사 '연영'은 한 개발도상국에 파견된다. 특히 최근 아동 노동 착취 문제가 재기되어 몇몇의 책임자가 체포된 마을로 말이다. 연영은 그 피해자 중 하나인 '까이'를 만난다. 평생 엄마 '시마' 밑에서 담뱃잎을 따며 자란 청각장애인 까이는 노동법 위반으로 체포된 엄마 대신 NGO의 보호를 받게 된다. 점차 까이와 유대감을 쌓아가던 연영은 까이가 거인증을 앓고 있음을 깨닫고 캠패인과 모금 활동을 통해 돕고자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나라의 모두가 신성시 여기는 소가 수간 당해 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그 난리통에 섞여 까이가 실종되고 만다. 연영은 까이를 애타게 찾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얼마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까이는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연영은 까이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돕고자 하지만, 해소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연영의 발목을 잡는다. 다시 한 번 '방관'의 실수를 저지른 은영의 자책은 깊어져만 가고, 마을에서의 갈등은 은밀한 비밀들과 부조리가 겹치며 극에 달한다.


줄거리를 통해 알 수 있듯, 작품에는 무수한 '몸'들이 등장한다. 일단 연영은 아이들의 몸을 돌보는 의사이다. 연영이 까이의 어려움을 발견한 것도 '몸'을 조사하면서였다. 까이는 오로지 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해온 인물이다. 날 때부터 지속해온 끔찍한 농장 노동, 즉 땀과 먼지에 얽힌 몸은 까이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으며, 소리를 듣지 못하는 대신 손짓 발짓으로 말하는 그에게 몸은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되어준다. 까이가 앓는 거인증 또한 그의 소통수단인 몸이 과하게 부풀어올라 결국 자신을 천천히 죽이는 병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까이는 NGO의 활동을 돕는 현지인 '명무'에게 몇 가지 수어를 배운다. 그러나 대부분은 상대가 수어를 모르는 까닭에 까이의 일방적인 소통이 되어버린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서 연영은 '도와달라'를 말하는 까이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다. 연영은 그저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끔찍한 순간들 때문에 까이에게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한다. 이 어긋남이 계속된다. 그들은 몸을 통해 만나고 함께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 몸 때문에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만다.


사실 이야기는 러닝타임 2시간에 욱여넣기에는 굉장히 복잡한 레이어를 지녔다고 느낀다. 그런데도 이해가 어렵지 않았던 게 인상적이다. 이야기를 경제성 있게 잘 정리하고, 감각적인 연출로 응집해 보여주며, 비밀과 반전을 보여주고 해소하는 방식 역시 영리한 극이었다. 이 복잡한 서사를 설명하기 위해 줄줄 대사를 늘어놓는 대신 <맆소녀>는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풍부한 몸짓과 절제된 대사, 경제적인 무대 활용으로 논리에 따른 감각에 집중하도록 말이다.


일례로, 까이와 함께 등장하는 마을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입모양만 뻐끔대는 아이들은 분명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데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성인 배우들이 아이를 연기할 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영리하게 봉합하는 동시에, 말보다 활발한 몸짓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아이의 근본적 특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이는 어른들이 사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경청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물론, 제3세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사라지고 배제된다는 광의로까지 넓어진다. 이 단순한 설정으로도 <맆소녀>가 얼마나 깊은 고민 끝에 만들어진 극인지를 엿볼 수 있다.


<맆소녀>는 또한 아주 무거운 사회적 의제들을 다수 다룬다. 아동 착취 문제, 아동 성폭력, NGO 활동의 한계점, 수간을 비롯한 비인간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신고의무자의 방관 문제 등을 꽉꽉 눌러담은 이야기이다. 때문에 관객에 따라 다소 피로함을 느끼거나 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들이 개별적인 문제가 아닌, 하나의 원으로 묶여 만들어진 폭력의 순환이라는 것이다.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라는 형태로 보이니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폭력을 경험한 아이는 어쩔 수 없이 폭력을 방관하는 어른이 되고, 결국 어떤 숭고한 마음과 감정으로도 해결 불가능한 부조리들은 위세를 더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몸을 통해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때 불행한 상황에 몸을 숨기고 있던 어리고 작은 몸이 아닌, 훌쩍 큰 단단한 몸으로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부드러운 비를 맞고 있다는 것을 감각하게 해주는 건 역시 몸이기 떄문이다. 또한 몸을 지닌 존재로서 서로 물리적인 온기를 나눌 수 있다. 보이지 않으면 만져지는 감각으로, 들리지 않으면 손짓 발짓으로 서로의 존재를 가까이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긴 느슨한 연대는 몸이 닿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언가를 낳기도 한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열심히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떠나는 이에게 또 남겨지는 이에게 안녕과 행복을 바랄 수 있게 된다. 연영과 까이의 마지막 이별 장면이 내게는 그러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이 작품 감상의 큰 축이 될 것이다.


연극을 볼 때마다 항상 우리가 '몸'을 지닌 존재라는 걸 실감한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몸을 사용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말이다. 특히 <맆소녀>는 더욱 그러했다. 상처받고 무너진 몸들이 무엇에 기대어 힘겹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들의 철저한 몸짓을 간과해오지는 않았는지, 아니, 우선 나의 몸이 내는 소리에 무감해져 왔던 건 아닌지, 이를 해소하고 더 넓은 사회로 나아가 선한 몸짓의 영향력을 떨치는 사람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지, 연이어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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