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리뷰
한국 사람 중에 명절 좋아하는 사람 몇이나 되겠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평소 소원하던 가족들까지 죄다 모이는 자리인 만큼 정신없는 드라마가 펼쳐질 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보편적인 풍경은 따로 있다. 바로 제2의 사회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무적이고 어색한 시간을 겨우 때운 채, 돌아가는 차 안에서야 솔직한 불만들을 정신없이 털어놓는 풍경. 그것이 어쩐지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최근 감상한 영화는 이것이 국경을 불문하고 얼마나 일상적인 풍경일 수 있는지 느끼게 했다. 바로 가족 관계의 미묘한 지점들을 탁월하게 포착한 작품, 짐 자무쉬 감독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이다.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하면 '성급하지 않은 태도'이다. 이 영화는 세 가족을 그저 담담하게 관찰한다. 감독의 인위적인 개입이나 교조적인 목소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관객의 판단을 기분 좋게 유예시키는 자연스러움이 묻어 있다.
영화는 제목대로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미국 동북부를 배경으로 한 '파더'는 아버지를 방문하러 가는 중년 남매의 대화로 시작한다. 차 안에서 조용히 오가는 둘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금전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듯 보인다. 관련 걱정을 내비치면서도, 한 번쯤은 해치워야만 하는 일을 애써 하는 느낌으로 둘은 아버지 집에 도착한다. 마당에는 고물 트럭이, 집 안에는 낡은 가구들이 즐비한 조촐한 집에. 마주 앉은 셋 사이에는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흐른다. 의무적인 안부 묻기와 칭찬, 누구도 웃지 못하는 유머가 황망히 오간다. 묘하게 겉돌던 대화를 뒤로 하고, 결국 아들 제프는 아버지를 위해 챙겨온 식료품들을 일일이 설명해준 후 누나 에밀리와 집을 떠난다.
두 남매가 떠난 후, 작은 반전이 드러난다. 에밀리는 행상에서 산 짝퉁 시계라고 했던 아버지의 롤렉스가 진짜라는 걸 파악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후줄근한 옷을 벗어던지고 수트를 쫙 빼입고 내려온 아버지는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잡는다. 낡은 담요로 덮거나 부러 부산스럽게 연출했던 가구들은 사실 좋은 취향을 반영한 삐까번쩍한 물건들이었다. 트럭 대신 빛나는 세단을 타고 집을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관객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가족이 얼마나 먼 타인인지 실감한다. 아버지의 이 비밀이 자식들에게 받는 보살핌과 걱정으로나마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싶은 귀여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듣거나 분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확실히 남는 것이 하나 있다. 때로는 '비밀'만이 가족이라는 관계를 얇게나마 지탱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마더' 역시 유사한 풍경을 보여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어머니의 집으로 자매가 찾아온다. 1부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자매들 역시 그다지 가깝게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동생 릴리스는 가까운 친구의 차를 타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오고, 언니 티모시는 홀로 고물 차를 끌고 오다 차가 멈추는 사고를 겪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내밀한 모습이 비춰지지 않도록, 또 함부로 보지 않도록 깊게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저찌 모인 셋은 완벽하게 꾸며진 집의 완벽하게 세팅된 식탁에서 어색한 식사를 한다. 음식은 거의 줄지 않고, 차만 끊임없이 홀짝이는 어색한 풍경에 관객은 피식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 직장 동료들과나 할 만한 변죽만 울리는 스몰토크들이 이어질 뿐, 이 형식적인 가족 모임은 자매가 다시 따로 돌아가며 허무하게 끝이 난다.
2부 초반에 어머니와 상담사의 통화 내용에 따르면 어머니는 언니 티모시가 더 신경이 쓰이는 듯 하다. 머리를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등 개성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는 자유로운 릴리스아 달리, 티모시는 외관부터 어머니를 닮았다. (단정하게 입은 셔츠와 스커트, 뿔테안경 차림이다.) 이들 사이를 단단하게 가르고 있는 어색함의 벽을 조금은 물렁하게 만드는 것이 그나마 릴리스이고 티모시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그런 동생을 점잖게 말리는 역할이다. 티모시의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는 씬이 잠시 등장하는데, 그는 식사 중 잠시 2층으로 올라와 화장실을 간다. 거울 앞에서 안경을 벗어 잠시 자신을 쳐다보는 티모시를 통해 우리는 그가 다소 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
그리고 떠나는 자매를 보는 엄마의 눈은 처음과 비슷하다. 가족 모임을 위해 셋이 준비하는 건 '무난함'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걱정이든 격려든 어떤 특징적인 반응을 지어야 할 필요가 없는 무난한 이야기들과 무난한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이 가족에 대한 예의이자,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 장은 전혀 다른 공간의 전혀 다른 관계를 그리지만, 어쩐지 묘한 유기성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장 역시 남매의 차 안에서의 대화를 보여준다. 둘은 쌍둥이로, 서로를 아주 신뢰하고 사랑하는 듯 보인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그들의 터전을 정리하기 위해 만난 둘은 부모님이 살던 아파트를 방문하며 유품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짜 면허증을 수십 개 만들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참 특별한 사람이었지' 같은 대사로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 알던 부모님인 채로 떠났다는 뉘앙스도 전달된다. 그저 웃으며 두 사람이 얼마나 독특한 궤적을 남겼는지, 그런 둘이 얼마나 그리울지에 대해 얘기한다. 부모님이 남긴 잡동사니들을 창고에 그저 놔둔 채 떠나는 남매의 뒷모습으로 3부는 막을 내린다.
이는 앞 1부와 2부의 가족들의 또 다른 결말을 보는 기분을 준다. 1부의 아버지의 비밀을, 그의 죽음 후에 깨달은 자식들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아버지의 새로운 얼굴을 알게될 것이다. 2부의 가족들 중 한 명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어쩌면 '내가 알고 있던 그'라는 이름의 무난함에 안심하며 싸한 그리움을 안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많은 유품들과 에피소드는 가족들 안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 모든 가능성을 안아주는 서사가 바로 3부가 아닐까 싶다.
세 장은 모두 독립된 이야기 같지만 이를 관통하는 요소들은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자, 영화의 유기성을 보장해주는 영리한 장치이기도 하다. 장소도 사연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모두 약속 장소로 향하기 위해 차를 타고 있다. 차 안에서는 비교적 솔직한 대화들이 흐른다. 이 움직이는 작은 공간은 모두 가족을 위해 그들이 안심할만한 무난한 모습을 준비하고 점검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차 안에서, 혹은 잠시 멈춘 차밖에 서서 그들은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을 본다. 이야기 초반, 1부 '파더'에서 딸인 에밀리가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은 어디에든 있지'라는 대사를 한다. 영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샷들로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흘러가지만, 딱 이 장면,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이 나오는 장면에서만 감성적인 음악이 깔리며 인위적인 느낌의 슬로우 모션이 걸린다. 순간적으로 꿈 같은 풍경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이 어디에든 있는 것처럼, 어느 나라의 어느 도로에서나 교통 규칙에 묶인 차들을 비웃으며 자유롭게 누비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3장의 이야기들은 모두 '어디에든 있는 이야기'라는 놀라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또 그들의 대화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Bob's your uncle(밥이 네 삼촌이다)'인데, 간단하고 쉽게 해결되는 일을 묘사할 때 쓰는 관용어구이다. 북미권에서는 잘 쓰지 않고 주로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통용되는 말이라 한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1부에서 남매는 아버지가 이 말을 했을 때 '우리 삼촌은 테드인데요.'라고 답하며 의미를 전혀 캐치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가족 간의 어색한 대화 밑에 깔린 수많은 서브텍스트들을 단 번에 단순화 시키는 이 어구는 그나마 그 관계에 기름칠을 해준다. 그냥 '문제 없지!', '세상살이 다 간단하지!' 라는 말로 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가장 수월한 것이다.
가족이란 까마득한 타인보다도 낯선 존재라는 말이 있지만, 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생기는 의무들은 그 낯섦에 자꾸만 죄책감을 심겨준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간이 가족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만큼의 불순물 없는 사랑을 못 품는 것이 조금 슬프고,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체념에 빠지겠지만, 결국 가족에는 그 어떤 특별한 의미도 붙일 필요 없다는 담담함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 담담함의 핵심에는 어쩌면 가족은 우리에게 평생 낯선 존재일 것이라는 사실이 있다. 살면서 익숙함을 공격하는 돌들을 수없이 맞겠지만, 가족의 그것만큼 파괴력이 큰 것은 없을 테다.
그러나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밥이 네 삼촌'이니까. 가족이라는 이름, 그 울타리만으로 때로는 충분해지는 관계도 있다. 어떤 미사여구를 특별히 붙이지 않아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