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번 먹자
가정의 달이라 그런지 요즘 들어 약속이 부쩍 늘었다 어린이날을 맞아 우리 집 공주의 옷을 사러 가는 일정 부터 시작해서 어버이날에 맞춰 할머니 할아버지와 식사하기 그리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친구들과의 밥 한 끼 약속까지 달력 한편이 꽤나 분주해졌다
사실 친구들과의 약속은 웬만하면 조심스럽게 거절하고 있다 바쁘기도 하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기도 해서다 그런데 그런 전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어느 날 슬쩍 묻는다
“아빠 지난번에 친구랑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했는데 언제 먹어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 그건 그냥 인사 같은 거야 잘 지내고 있지? 안녕? 같은 말 있잖아.”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묻는다
“그럼 밥 안 먹을 건데 왜 밥 한번 먹자고 해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대답했다
“응 그냥 어른들끼리는 그렇게 이야기해.”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마치 ‘그게 말이 돼?’라는 눈빛으로 아이는 아직 말이라는 게 마음을 전하는 가장 솔직한 도구라고 믿는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어른들의 세계는 아직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나도 안다 그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지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인사는 진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마음은 있지만 행동으로 옮길 여유가 없다는 뜻에 더 가깝다 어떤 경우엔 정말 그저 말뿐인 공수표에 불과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직접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서로를 잊지 않았다는 일종의 표시처럼
삶이라는 게 참 그렇다 확실한 기약도 없이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낸다 어쩌면 서로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우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배려일 수도 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작은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앞에서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직은 세상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리고 내 뱉은 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아이 앞에서 나는 괜히 뭔가 잘못한 어른이 된 기분이다
나는 평소 공수표를 날리는 걸 싫어한다 허튼 약속을 하느니 차라리 말을 아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만큼은 나도 모르게 자주 꺼낸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사회적인 인사처럼 어느새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 있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 공주도 어른이 되면 그렇게 될까?
말과 마음이 꼭 일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른들의 세계는 원래 그렇다고 그 말이 꼭 실천되지 않아도 예의이자 배려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때가 오면 오늘의 내 모습을 조금은 이해해 줄까 그리고 나처럼 그런 말 앞에서 조심스러워지는 어른이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