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버려야 지킨다던 말 앞에서
요즘 들어 마음이 자주 흔들린다 회사 일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지금의 ‘삶의 방향’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7년 넘게 준영업직으로 일했다 그 시절에는 하루가 늘 전쟁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거래처를 돌고 밤에는 회식 자리에 불려 다니며
“다음 달엔 더 잘하자”
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일은 당연하게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이를 돌봐주는 배우자가 있었고 나는 돈을 버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역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정은 내게서 멀어졌고 나는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었다 그제야 알았다 ‘가정을 지킨다’는 게 단지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 그 시간을 내가 얼마나 잃어왔는지를 그래서 3년 전 나는 내근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실적 대신 서류를 다루고 사무실의 업무를 처리하는 일로 야근이 거의 없고 출퇴근도 일정하다길래 ‘이제 좀 아이와 시간을 맞출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무엇이 더 나은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지금 내 상황에 맞게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특이하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름 안정적이고 직원들끼리도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술을 유난히 좋아하신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늘 이렇게 말하신다
“오늘은 그냥 밥 한 끼 먹고 가자.”
물론 그 ‘밥 한 끼’에는 항상 술이 곁들여진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간수치가 좋지 않아서 더더욱 피하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상 거절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사장님이 가족들은 타지에 있으셔서 홀로 지내시는 분이다 보니 그 외로움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가 늘 불편하다 면접 때 분명히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저는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일정해야 하고 회사 업무적으로 야근이 생기는 경우 미리 조율이 되어야 사람을 구해서 아이를 봅니다.”
사장님도 고개를 끄덕이시며
“야근 거의 없고, 신규점 오픈할 늦게 끝나서 그때만 도와주면 됩니다 그런 건 일정이 미리 나와요.”
라고 하셨다.
그 말을 믿고 입사했다 그런데 그분에게 ‘퇴근’은 단순히 일을 끝내는 시간이 아니었다 ‘같이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포함된 개념이었다 퇴근 후에도 남아 술잔을 채우는 다른 직원들을 볼 때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닌가 싶다가도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면 곧바로 마음이 돌아선다 그 시간, 누군가에겐 단순한 회식일지 몰라도
나에겐 아이와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는 단 하루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들은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사장님이 다른 직원에게 하셨다는 말이었다
“가정을 버려야 가정을 지킬 수 있다.”
그 말이 참 묘하게 들렸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가정을 위해 돈을 벌고 책임을 다하려면 개인의 시간쯤은 희생해야 한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가정을 버리면서 어떻게 가정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아이 곁에 없는데, 그게 지키는 걸까?
아이가 잠든 얼굴을 보며 ‘오늘도 돈은 벌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진짜로 마음이 편할까
나는 돈보다 시간을 선택하려고 하려고 했다 아이의 웃음, 짧은 대화, 하교 후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그 밝은 목소리 그게 내 하루를 버티게 하는 전부이다
누군가는 그걸 ‘비효율적’이라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그 시간이야말로 삶의 이유다
요즘 ‘불혹’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린다 직장에서의 책임감과 아버지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계속 중심을 잃는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아직 ‘진짜로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흔들리면서도 결국엔 아이의 목소리로 다시 중심을 잡는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휴대폰 속 사진을 열어본다
그 작은 얼굴 하나가 내가 그래도 참고 버티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은 여전히 술잔을 권하지만 나는 오늘도 물 잔을 들고 아이의 웃음에 건배한다 그게 내가 지키고 싶은 가정의 모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