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상을 반영하며 매 순간 새로운 의미로 거듭난 용감하고 변화무쌍한 핑크
시대상을 반영하며 매 순간 새로운 의미로 거듭난 용감하고 변화무쌍한 핑크. 우리 사회의 가장 깊숙한 곳을 딛고 핑크가 요요히 솟아난 순간과 핑크가 전하는 따스한 연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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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건 핑크는 언제나 이렇듯 시대와 관계를 맺고 연결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온 색이었다는 사실이다.
“남자는 역시 핑크지.”
언뜻 계몽적인 표어처럼 들리지만 정확하게 핑크는 여성의 색이라는 전제를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그러나 구태여 꼬아 들을 필요도 없다. 실제로 핑크는 남자의 색이었으니까. 보라색과 마찬가지로 귀했던 핑크는 17세기 유럽에서는 군주가, 18세기에는 궁정의 남성들이 즐겨 입었을 정도로 귀족과 특권층이 향유하던 색이었다. 핑크가 오랜 시간 남아를 상징하는 색이라는 건 다양한 미술사적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르네상스 회화에는 분홍색 예복을 입은 아기예수가 등장했고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1782년 작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년>과 자크 에밀 블랑슈의 <분홍색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의 초상화>에서는 고급스러운 분홍색 의복을 입고 있는 소년이 나온다. 100년이 흐른 뒤에도 비슷한 분위기는 여전히 이어졌다. 1897년 <뉴욕타임스>의 ‘아기의 첫 번째 옷’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으로 간주되지만 어머니들은 그 문제에서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
영국 출신 작가 개빈 에번스의 <컬러 인문학(색깔에 숨겨진 인류 문화의 수수께끼)>에 따르면, 핑크가 함의하는 성별 코드가 역전되기 시작한 건 제2차 세계대전부터다. 전쟁이 끝난 1950년, 세계 사회에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미국 내에는 낙관주의가 만연했고 제조 회사와 광고 회사는 분홍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호사스러운 소비와 사치를 부추겼다. <핑크와 블루: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분간해내는 미국>을 쓴 사회학자 조 B. 파올레티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국 가정에서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화하려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 일환으로 핑크색이 여자 아이를 나타내는 지표로 주목을 끌었다”며 “소매업체들이 핑크는 여자 아이의 색이라 광고하면서 더 많은 분홍색 옷과 장난감을 디자인하고 팔았다”고 설명한다. 엄마들은 그전까지 여자 아이들이 많이 갖고 있지 않았던 분홍색 옷과 물건을 전부 새로 사줘야 했고, 그렇게 핑크는 소녀의 색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편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디자이너 스키아파렐리가 고안한 ‘쇼킹핑크’로부터 핑크가 독창적이고 센슈얼한 이미지까지 덧입으며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핑크 립스틱과 매니큐어도 불티나게 팔렸다. 이렇듯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맞물려 시작된 핑크 열풍은 대중문화미디어라는 철도기관차를 타고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오드리 헵번의 뮤지컬 영화 <퍼니 페이스>에 나온 ‘Think Pink’ ‘Pink Champagne’ 같은 음악이 인기를 끌었고, 1955년 유명 자동차 회사 닷지는 “이보다 더 여성스러운 차는 없다”는 홍보 문구와 함께 핑크색 자동차를 판매했다. 역사상 가장 화려한 자동차로 손꼽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1959년식 캐딜락 엘도라도도 핑크색이었다. 성별을 막론하고 핑크는 큰 인기를 끌었다. 당대 미국에서 핑크는 자본과 쾌락과 낭만을 상징하는 최고의 기호품이었다.
1953년 작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영화는 몰라도 핑크색 튜브톱 드레스를 입은 마릴린 먼로가 턱시도를 입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노래도 이때 나왔다. 채도 강한 핑크 하면 당대 최고의 섹스심벌이던 마릴린 먼로가 자연스레 떠올랐고 그 무렵 핑크는 단순히 여성성만이 아닌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는 색으로 인식됐다. 영화 속 마릴린 먼로가 뇌는 하얗고 돈은 밝히는 쇼걸을 연기했기 때문에 핑크는 ‘백치미’, ‘골드디거’ 같은 이미지와 연결됐고 이 때문에 핑크색은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페미니스트들의 반발과 미움을 사게 된다. 전통사회가 부여한 고정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와 불가분했던 핑크는 당대의 페미니스트가 가장 경멸하는 색상이었고, 반대로 반페미니스트에게는 환영받았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의 조류에 맞서 여성적인 매력을 강조하던 <매혹적인 여성성(Fascinating Womanhood)>의 저자 헬렌 B. 앤들린은 보란 듯 올 핑크 룩을 입고 강단에 섰는데 그녀의 강의 내용은 ‘페미니즘을 버리고 주부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핑크를 보다 복합적이고 섬세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 핑크는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나 유방암 캠페인 리본, 성적 자유와도 연결된 색상이다. 전통적인 성구분을 인정하던 핑크는 이제 LGBTQ 커뮤니티가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내세우는 ‘기호’로 일어나는가 하면, 여성들이 오히려 성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색상이 됐다. 문화예술계에서 역시 핑크는 공감-연대-용기 같은 것들과 접속하는 언어다. 마일리 사이러스는 “핑크는 단순한 색깔이 아닌 태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의 핑크에 이식된 공감-연대-용기의 코드가 만약 여성성과 관계된 것이라면, 핑크는 아마도 여성의 색깔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 하는 말은 핑크에 성별을 나누거나 어떤 이념에 대해서 논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이렇게 사회를 들썩이고 논쟁거리를 던져주며, 문화적으로 ‘포퓰러’하고 이토록 화려하게 별주한 색상이 또 있었나 싶다. 분명한 건 핑크는 언제나 이렇듯 시대와 관계를 맺고 연결되며 의미를 획득해온 색이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일러스트 겸 디자이너인 케이 블레그바드가 쓴 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핑크는 극단적이다. 사람들이 극도로 좋아하든 극렬히 싫어하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든 아니든, 색에 담긴 의미를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어느 쪽이든 강렬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어떤 색보다 핑크에 호오가 갈리는 건 사람들로 하여금 핑크가 떠올리는 세계가 어느 쪽이든 분명하다는 걸 의미할 테다.
역사적으로 핑크가 어떤 사상이나 태도를 상징하며 의미가 변해온 건 맞지만 다만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는 취향이라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연초에 새해 달력처럼 열어보는 <트렌드 코리아 2025>에는 ‘무해력’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자극과 도파민에 피로도가 쌓인 현대인이 점점 감정적으로 무해한 존재들에 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푸바오나 다이노탱을 ‘덕질’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오늘날 사랑, 공감, 연대라는 따뜻한 관념들과 호응하는 핑크는 무해한 존재들이 부상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더욱 시의적절하게 느껴진다. 핑크는 그저 하루의 기분을 전환하고 무해한 위로를 안기는 존재로서 우리 주변 곳곳에 도포돼 있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다. 뒤 페이지에는 우리 사회 속 핑크가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 순간들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핑크 아이템이 이어진다. 핑크와 관련된 인문학 책과 기사를 뒤지던 중 이번 특집을 통해 우리가 핑크를 다루는 관점과 가장 맞아떨어지는 문장을 발견했다. 유명 예술가나 작가의 명언도 아닌 라는 웹미디어 기사에 삽입된 독자의 코멘트였지만 어느 것보다 절묘했기에 여기에 남긴다.
“밝거나 옅은 분홍색은 나를 유혹적이고, 영리하며, 그날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주죠. 나는 그걸 '설탕과 향신료,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과 연관 지어요. 꽃, 낭만적인 제스처, 그리고 친절함.”
레퍼런스
<컬러 인문학(색깔에 숨겨진 인류 문화의 수수께끼)>(개빈 에번스), <Pink Book?아직 만나보지 못한 핑크, 색다른 이야기>(케이 블레그바드), <내셔널 지오그래픽>, <Verywell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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