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사랑과 욕심을 접고 그저 바라만 볼 뿐입니다. 더 이상 함께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치우쳐 있었어요. 늦었지만 헤어져야 했습니다. 애증의 4년이었어요. 충분합니다. 행복했어요.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RG 모델을 다 모았습니다. 평생의 숙원이었던 이쁜 유리장 두 개를 구입해서 녀석들을 잘 정리해두기도 했어요. 건담이라는 로봇 이야기입니다. HG, RG, MG, PG로 퍼스트, 시난주, 유니콘, 프리덤 등 기체의 이름과 종류가 참 많습니다.
별구장 고양점에 다녀왔습니다. 오래간만에 건프라 매장을 찾았네요. '어이쿠. 언제 이렇게 많은 녀석들이 한국으로 들어왔지?' 처음 보는 모델들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현란한 녀석들의 자태에 감탄을 금치 못해요. 그대로 몇 개를 집어서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동안 잊고 있어서 미안했다고 사과도 하고요.
놀라운 정신력이었습니다. 끝까지 참았어요. 그저 바라만 볼 뿐입니다. 자칫 몇 개를 구입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어요. 동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 뻔해요. 애처로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지만, 그런 건담을 저는 애써 외면해야 합니다. 참아야 해요.
"아빠. 이 모델은 아빠가 좋아하는 녀석이잖아요?"
"움....."
"아빠, 여기 좀 보세요. 티타늄 피니쉬예요. 저 반짝이는 거 좀 보세요. 와 대박이다."
"움....“
"아빠. 와 이건 못 참지. 이거 PG죠? 와 진짜 크다. 디테일 좀 보세요."
"움...(아빠도 눈이 있다. 아들아. 다 보고 있어)...."
아들의 응원과 격려를 등에 업고 몇 개의 모델을 구매했다가는 분명 이런 질문이 돌아올 겁니다. 저는 허둥지둥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아이는 개선문을 지나듯 장난감매장으로 걸어갈 것이 뻔합니다.
"아빠. 근데 아빠는 사고 싶은 로봇 다 사고, 왜 나는 사면 안 되는 건데요?"
"아빠. 아니 아빠는 저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아빠. 기준은 다 똑같아야 한다면서요? 공평이요 공평."
사실은 건담을 접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생각보다 건담을 조립하고, 관리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삶 속에 적당한 휴식이 필요해 시작했던 <건프라> 입문이었지만, 이제는 아픈 마음들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갑작스러운 화를 참지 못해 마음이 힘들지 않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규칙으로 호흡을 해요. 건프라 조립이 제게는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괜찮아요.
건프라 조립만큼 재미있는 것들도 찾았습니다. 새벽에 조용한 피아노 반주를 들으며 랩탑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짧지만 작은 몇 개의 문단으로 글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참 좋아요. 주말이면 제가 가진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호흡하며 삶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와 여행을 가거나, 산을 오릅니다. 아이도 즐거워야 하니 눈높이를 아이에게 맞추려고 노력하고요. 그런 삶의 부드러운, 그러나 능동적인 선택이 참 평온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조금씩 게을러집니다. 점점 연초에 다짐한 숫자들의 범주를 벗어나요. 줄이려고 했던 금주 횟수는 늘어나고, 하고자 했던 운동 빈도는 줄어듭니다. 잠시 몸과 기분에 이끌려 별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자면, 두 개인 귀보다 하나인 입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변화의 수용폭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는 실제적인 방법을 좋아한다. 세상의 모든 이론은 우리가 그걸 적용해서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다. 나는 예전부터 늘 제대로 된 일 처리 방법을 알고 싶었다
<치유> - 루이스 헤이 지음 - 중에서
조금씩 경로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을 인지합니다. 그렇다면 조금만 제 자리로 돌려야겠어요. 그것이 하루를 더 풍족하게 해 준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빠르게 얻는 도파민이 좋지만은 않아요. 소망하는 생각을 구현해야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오늘 대단한 인내심으로 건담 몇 녀석을 포기했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는 자신이 기특해요. 소비를 참은 행동으로 소비할 시간을 지켰습니다. 다행이에요. 열한 살에게 질 뻔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생각과 마음을 단단히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더욱 응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