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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Jul 08. 2024

마흔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그만의 감정을 담은 목소리가 기타 반주 위에 흐른다. 김광석 님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20대와 작별하고 서른을 맞이했었다. 스무 살 젊음을 보내는 아쉬움 이면에는 서른 살의  깊이를 바라보는 기대감도 있었다. 이제는 그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서른 살을 재촉하기도 했던 오래전 그날이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 그의 노래는 늘 새롭다. 어느 때는 하나의 문장으로, 또 어는 때는 하나의 단어가 머리로 들어와 깊은 상념에 빠지곤 한다.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뒤 한숨과 함께 내뿜은 막연한 걱정과 조바심은 뭉글하게 퍼지며 이내 눈앞에서 사라지길 반복했다.


간혹 그 시절의 일기를 꺼내어 예전 나의 생각을 마주할 때가 있다. 개인의 자유로움을 위해 분주했던 시간이었다. 청춘은 늘 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청춘이었음을 깨닫는 탓에 그 기억의 아름다움 뒷면에는 대부분 아쉬움이 공존한다. 청춘에 비하지 못할 안정감을 가진 지금의 나이지만, 몇 해가 지나고 나면 지금의 서른 즈음은 또 아쉬움으로 추억할 테지.


 서른 즈음에 부르는 노래가사가 마흔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새롭게 채워 넣고 싶었던 내 안의 색채는 다소 빛이 바랬지만 그 색이 변질되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탄력이 떨어진 건 어쩔 수 없지만, 얼굴에서 감정과 표정을 잃지 않았다. 다행히 분노와 욕심만 남은 것도 아니다. 보톡스 주사나 필러로 희로애락을 감추고 싶지는 않은데, 구겨진 마음을 피거나 채울 수 있는 시술주사가 있다면 그건 한번 해보고 싶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마음을 먹어도 하루를 보내자면 감내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잠깐이라도 방심하는 사이 그 사실을 잊곤 한다.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학생은 무직이 된다. 사회적 기준의 무직이 되기 싫었던 난 아등바등 몸부림을 부려 직장인이 되었다. 얼굴 표정에 사색과 고독을 담고 싶어 했던 스물여섯 청년은 이제 마흔 중반이 되었다. 배짱과 호기를 부릴 대상이 남이 아닌 나 스스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나이다. 너른 봄바람을 얼굴에 담고 싶다. 당연한 것에 감사하고, 노력하는 가치를 통해서 얻는 행복을 얼굴에 담고 싶다. 내 얼굴에 책임을 지고 싶다.


우리는 보통 '노화'라고 하면 주름진 얼굴, 굽은 허리, 느린 걸음걸이 같은 특징적인 모습을 떠올린다.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라이프스타일과 밀접한 상관이 있는 생물학적 노화는 우리 몸에 그 결과를 남긴다.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정희원 지음- 중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마음이 구겨지는 날이 있다. 좋은 글과 책으로 마음을 채우고 나면 마음이 조금 펴지는 것이 느껴진다. 만족이라는 녀석은 늘 내 주위에 머무르지만,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녀석은 절대 스스로 먼저 말을 걸진 않는다.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푸른 언덕에서 벨벳털을 가진 부드러운 아기곰과 함께 뒹구는 기분이, 살랑거리며 지나는 포근한 바람이 내 얼굴에도 머물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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