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day - 실천이 어렵지
TV를 잘 보지 않는다. 선택적 취사를 통해 좋아하는 영화는 즐기고 있지만, 단순 도파민을 생성하기 위한 TV시청은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엄마께 들었던 조언을 이제야 받아들였다.
"그럴 시간 있으면 책이나 좀 읽어라."
참 오랜만에 TV 리모컨을 잡고 빈둥빈둥이다. 29년 간의 수난을 이겨내고 드디어 챔피언 구단의 팬이 된 탓이다. TV로 하이라이트를 찾아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가을 야구를 위해 야구장은 총 네 번을 찾아갔다. 경기장에서 느낀 감동과 재미가 더해지니 TV 중계의 하이라이트로 복기를 하는 재미가 상당하다.
정우영 캐스터의 신나는 샤우팅 중계를 다 보고 나서 다른 방송을 찾던 중에 한 채널에서 리모컨질을 멈춘다. 한 외국인이 무인도에서 생존체험을 하고 있다. 산호와 모래알까지 다 비치는 맑은 푸른 바다가 작은 모래해변을 만나는 곳이다. 뒤로는 화강암 절벽이 자리하고 시선을 따라 절벽 위로 오르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색 하늘이 보이는 작은 섬이다. TV로 보는지라 습한 해풍과 뜨겁게 작렬하는 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바로 저곳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전설의 무릉도원인가 싶다.
TV 속 남성 한 분은_약간 간디 님의 모습 같은_바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고 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피티병을 반으로 잘라 어항을 만들고, 쓰레기 더미와 함께 밀려온 그물을 손질해서 물고기가 다니는 자리에 덫을 놓기도 한다. 과연 저렇게 해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까 싶은 호기심에 LG 트윈스의 스트라이프 유니폼과 정우영 캐스터의 샤우팅 중계는 이미 잊혀있다. TV 속 무인도의 시간이 빠르게 지난 오후 시간에 주인공은 섬의 곳곳을 누빈다. 오전에 설치한 어항과 그물 덫에 걸릴 먹거리를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한 마리도 없다. 이래서 방송이 되나 싶을 정도다. 맨 vs와일드의 베어 그릴스였다면 상어라도 잡았을 텐데. 아니 영국이 아니라 국내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김병만 족장이 있다. 정법의 김병만 씨라면 크레이피쉬라도 잡았을 텐데.
간디를 닮은 저분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빈 어항과 그물을 보고는 그 자신도 머쓱했는지 허탈하게 웃고 만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행복해요. 그 상황에 맞서 이겨내려고 하니 힘든 거예요. 실천하기는 힘들지만요."
프로그램의 이름도, 출연자의 이름도 알 수 없지만, 함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져 조금 더 방송을 지켜봤다. (나중에는 결국 작은 피라미 한 마리를 잡아서 수프를 끓여 먹더라.)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그의 조언만큼이나 그것이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고 말하는 그의 허탈한 웃음이 참 정겨웠다. 참 많은 진리와 조언들 속에서 삶을 주도하려고 하지만, 그중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나의 하루가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가 앎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출연자의 허탈한 웃음과 자연함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참 좋았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은 너무 전투적인 거 같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꼭 결괏값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닌데, 조직의 문화에 현혹된 나머지 무엇이든 결과물을 만들려고 하는 강박이 심하다. 하필 사업계획 시즌이다. 회사와 조직을 위해 무슨 그렇게 지고지순한 애사심을 가져야 하는지. 주 5일 내내 회사의 MS 성장과 현장인력의 교육, 뭐 이런 생각들로 가득한 요즘이다. 정작 회사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정말 미련한 짝사랑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다른 사람들과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들과 나의 삶의 목표가 동일할 수 없다. 회사의 S 고과보다는 5km의 25분 벽을 깨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 내게는 이것이 더 가치 있다. 그러니 사무실에서는 자존심을 세울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갖는 것이 우선이다. 맞서지 말자.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실천하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누구는 해가 졌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는 별이 떴다고 한다. 정답은 없다. 걸어가는 내 길에 존재하는 명답은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