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day 지리산 노고단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았다. 온통 흰색뿐이다. 풍성했던 제 살들을 다시 땅으로 돌려보낸 앙상한 가지들이 온통 하얀 옷으로 갈아입었다. 11월 가을에 내린 첫눈이었다.
가을 초입을 좋아한다. 만추는 늘 아쉽다. 진한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은 단풍을 보면 문득 이별을 준비해야 할 것만 같다. 무엇이건 마음을 떼는 일은 어렵다.
유독 올해는 일정이 꼬인 탓에 가을을 만나지 못하고 11월 중순이다. 가을의 바람이 조금은 남아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남해(남해 바다 아니고 남해군)로 향한다. 서울에서 출발한 길은 파란 하늘 아래에서 그 모습을 달리하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자동차 바퀴의 질감은 그대로지만, 지나쳐 가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클로드 모네의 <건초 더미> 연작이 이러할까? 시간과 마음가짐의 흐름을 달리 하니 그 모습이 제각각이다.
가을 하늘과 가장 가깝게 닿고 싶다. 지리산 노고단은 고개를 올리지 않고도 파란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성삼재 휴게소로 향한다.
가을 아래 구례는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은행나무와 갖가지 색의 변신이 한창이다. 너그러운 녀석들이다. 여름 내내 부풀렸던 모든 것을 다시 돌려준다. 고마운 마음에 한 호흡 크게 공기를 마신다. 전날 내린 비로 땅은 젖어있다. 비에 젖은 가을이 참 좋다.
산으로 들어와 성삼재 휴게소로 올랐다. 땅과는 다른 차림새다. 전 날 내린 비는 눈이 되었다. 햐얀 옷을 입은 지리산 정상자락은 밤새 겨울로 모습을 바꿨다. 산에 들어가 한 시간 정도 눈을 밟으니, 이내 다시 함박눈이 내린다. 땅 위 1500m에서 첫눈을 만났다. 유독 힘들었던 한 해의 잡념과 후회를 모두 덮어 주려나 보다. 기적 같은 아름다움 속 가온이다.
어린 시절 작은 발로 밟았던 눈의 감촉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다. 가을을 만나 반가웠던 마음이 바스락, 오도독 눈의 소리와 함께 벅차오른다. 첫눈은 늘 옳다. 눈에 보이는 하얀 도화지가 마음에 그대로 옮겨졌으면 하고 바란다. 세상을 덮은 하얀색이 마음으로 들어와 속삭인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내가 다 덮어줄게. 어제는 잊어. 다 잘 될 거야.
운 좋게 감사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과분한 선물이라, 소리라도 함께 나누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