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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Feb 01. 2024

계단으로 출근합니다

천국의 계단은 어딘가요?

사람이 몰리는 출퇴근, 점심시간. 

네 개의 엘리베이터가 18층을 다 소화할 수 없으니 건물 안 직장인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줄을 설 수 밖에 없다. 이때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의례하는 인사를 주고받아야 하는데 ‘E’에서 능동적인 극‘I’로 성격이 변해버린 후, 나는 이런 스몰토크가 참 불편하다. 차리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상관이 없는데 괜히 어설프게 아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선택한 건 계단이다.


본사 발령 이후에 길어진 출퇴근 시간만큼 운동시간은 줄어들었다. 무게를 치거나 달리면서 느꼈던 카타르시스 대신 지옥철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자리한다. 마침 회사 건물은 층고가 높다. 계단을 타야겠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나서 어색한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어 마음이 편하다. 운동은 덤이고.


점심시간.

엘리베이터 대기줄에서 빠져 좌측 계단 출입문으로 향한다. 그런 내게 동료들은 살이 안 찌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느니, 그래서 배가 안 나온다느니 각자의 한 마디를 더한다. 사실 살이 안 찌는 이유는 계단이 아니라 덜 먹어서다. 운동만으로는 살이 빠지지 않는다. 덜 먹어야지... 계단은 몸이 아닌 마음을 위한 장소다.


출근시간 계단에서 가끔 동료들을 만나는데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계단에서 만나는 분들은 거의 선배다.

20대, 30대는 물론이고 내 또래의 동료들도 거의 보지 못했다. 30대까지야 아직은 신체에 이상반응이 많지 않을 때일 테고, 일년에 한 번하는 건강검진기록지에도 적색보다는 초록색 신호등이 더 많은 때이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현명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현실은 다르다. 외양간은 원래 소를 읽고 나서 고치는 것이 국룰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의 동료들 또한 아직은 국룰을 따르는 모양새다.


직장인은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진대사 능력은 떨어지는데, 세상에 맛있는 음식은 너무 많다. 주인을 따라 함께 게을러진 장기 탓에 우리가 먹는 맛있는 음식들은  근육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제 편한대로 복부에 자리한다. 상체_ 그중에서도 특히 복부가 근엄하고 우람해지는 동안 하체는 외롭기만 하다. 다리는 얇아지고 엉덩이는 중력에 순응한다.


없는 근육을 채우는 것보다는 있는 근육을 불리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쉬운 건 알겠는데,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 막상 하고 나면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뭐든 그렇다. 시작이 가장 힘든 거니까. 계단을 오르면서 사무실 동료를 생각해 보니, 배가 나오지 않은 남자 직원이 몇 없다.


고혈압, 당뇨 같이 식생활을 같이 하면서 가족력으로 생기기도 한다. 배가 나오는 것은 회사력인가 보다.


어라?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계단을 오르면서 잊고 지내던 선배들을 꽤 많이 만났다. 임금피크 진입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많은 선배들이 본사의 현장지원 파트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업무가 다르고, 부서가 각 층에 퍼져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만날 날이 없다. 계단을 이용하고 나서야 그들을 마주했다. 특이한 점은 회사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다.


계단을 오른다. 빠르고 편하게 엘리베이터를 타던 선배님들이다. 이제는 뒷짐을 지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오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도 걸어서 올라가야 마음이 편하다. 어찌 괜히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그랬듯 선배님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25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입사했을 때의 건강한 몸은 온 데 간 데가 없다. 이룬 업적이 많은 30년이지만 그 영광이 계속 지속되어 남았던 것은 아니다. 얇아진 다리로 계단을 오르면서 턱까지 숨이 차오른다.


과거 실적을 위해 움직이던 빠른 눈매와 얼굴 표정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미간의 주름은 그대로지만 양 눈썹의 중심부와 입술의 끝자락은 올라갔다. 표정만 부드럽게 바뀐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유해졌다. '니' 자로 끝나는 문장으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


왜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왜 그 시절 그때는 후배들을 괴롭히기만 했을까?


계단을 오르면서 생각한다.

엘리베이터의 편안함과 빠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마치 사람들과의 불편함을 즐겼던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선한 웃음이 어색하다. 날고 기던 선배의 변화를 보면서 또 하나의 반면교사를 한다. 선배의 은퇴준비를 바라보면서 '부질없다'라는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찬란한 시절, 그 고독을 알고 있으니까. 회사의 실적이라는 가치에 늘 밀려있던 개인의 삶, 가정 그리고 개인의 감정이었다.


다만 나는 계단을 선택했다. 조금 먼저 계단을 오른다. 그것이 천국의 계단인지 단순 운동을 위한 계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계단을 오르면서 느끼는 대퇴부의 긴장이 좋다. 숨이 차오르면서 뜨거워지는 심장이 좋다. 임피를 맞이하고, 정년을 맞이하기 전에 조금 먼저 걷고 싶다. 먼저 변하고 싶다.


앞으로도 계단을 계속 올라야겠다.

조금 천천히 가도 되겠구나.

빠른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구나.


초등학생이나 어른 학생이나.

어린이나 어른이나.

하루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누구나 똑같다. 하루가 어떻게 생각대로만 흘러가겠는가? 그렇게 무심하게 보내는 하루가 한 달을 만들고, 한 해를 만든다. 참 느린 듯 흘러가는 하루는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일년을 만드니까.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한참을 허리가 꺾일 만큼 웃는다. 지은도 아주 오랜만에 웃어보는 날이었다. 웃는 기분이 이런 거였구나. 뇌한테 농담할 만하네.

실은 말야. 오늘부터 난 웃는 걸 선택하기로 했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선택할 수는 없지만 울거나 웃는 건 유일하게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거잖아.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중에서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됐다. 나는 웃는 걸 선택하겠다.


빠른 게 빠른 게 아니고, 느린 게 느린 게 아닐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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