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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Jan 29. 2024

새로가 부릅니다

직장인이라도 될 걸 그랬어

"집에 컴퓨터 있는 사람 손들어. "


선생님의 질문에 웅성웅성하던 아이들은 고개를 좌우로 살핀다. 이내 60명이 가득 들어찬 교실 안에서 두세 명이 오른손을 구부정 올린다.


초등학교_당시 국민학교 시절 새 학기를 시작하는 학교는 의례적으로 가정통신문을 집으로 보냈다. 선생님이 나눠주신 그 회색 종이에는 집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자동차는 소유하고 있는지, 부동산과 동산으로 나눈 금액은 얼마인지가를 묻는 질문을 포함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왜 학교에서 왜 우리들의 부모님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없지만 숙제하듯이 아버지는 조용히 답을 적어 내게 건네주시곤 했다.


어른 손바닥만 한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했던 16-bit 컴퓨터가 슬슬 가정으로 보급되려고 하던 즈음이었다. 부끄럼이 많았던 나는 컴퓨터 소유 여부를 확인하는 그 질문이 너무 싫었다. 게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용지물의 그 흰색 기계뭉치도 별로였는데, 재미도 없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손을 드는 것은 더 싫었다. 어찌 으스대는 것 같아서 친구들에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손을 안 들고 딴짓을 하면 그만일 테지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순수함이 남아 있던 아이에게는 그 거짓말조차도 부담이었다.


아빠 그냥 회사 다닌다고 하라고


아이를 꾸짖은 적이 있다. 뒤틀린 생각과 직업관에 갇혀 있던 때였는데, 아이가 잘못해선 아니었다. 문제의 시발은 학교에서 보내온 가정통신문이었다. 더 이상 재산 규모를 묻진 않았지만, 학부모의 직업은 여전히 궁금해하고 있었다.


"딸. 오늘 재미있었니? 학교 다녀와서는 뭐 하고 놀았어? 뭐 하고 놀 때 제일 많이 웃었어?"

대화는 가급적 부모가 먼저, 구체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라고 어디에선가 본 기억이 있어 따라 했는데 좀 서툴렀다.


"어 아빠. 오늘은 별로 많이 웃지는 못했고. OO랑 그네 타고 놀다가 미세먼지가 너무 많다고 해서 집에 일찍 들어왔어. tv 보다가 인형 가지고 놀고 있었지."

입을 삐죽이며 아쉬운 듯 말하는 아이가 귀여워 한 마디를 더 보탠다.


"그랬구나. 잘했네. 그래도 밖에서 놀고 싶으면 나가서 놀아. 괜찮아 그래도. 대신에 엄마한테 마스크 달라고 해서 꼭 가지고 나가고. 알았지?"


"어 알았어. 근데 아빠. 오늘 학교에 숙제를 냈는데 거기다가 아빠 손해사정사라고 했어. 큰 회사 다닌다고 하려니까 엄마가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해서 OO화재 보험회사라고 적었구."

순간 발끈한 나는 정색하며 목소리에서 음정을 뺀다.


"아빠가 누가 물어보면 그냥 '회사' 다닌다고 하라니까 왜 그렇게 썼어. 무슨 보험회사고 손해사정사야. 그냥 회사원이라고 하면 되지. 아니야. 됐어. 아빠가 엄마한테 말할게."

어색한 공기를 느낀 아이는 풀이 죽어 바로 방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괜히 울화가 치밀어 옆 사람에게 방향을 틀어 나머지 성을 낸다.


"보험회사 다닌다고 말하는 거 싫다니까. 왜 그렇게 썼어. 뭐라 굳이 회사 이름을 넣어. 손해사정사는 또 뭐고. 누가 물어보면 그냥 급여소득자나 직장인이라고 말하라니까. 사람들이 색안경 끼고 보는 거 싫다고 나는!! "


가족도, 친구도 누구도 당시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 회사에 다니면서 왜 그렇게 자신의 직업을 경멸하는지.

그런데 나는 그랬다. 당시 나에게는 직업관이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일하면 잘하는 건데?


사회초년생으로 시작한 보험회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식을 허물었다. 나이롱환자들의 보험사기, 영업마감을 위해 무더기로 체결되는 허위 작성계약 등이 가득한 보험업계에는 책에서 배운 보험의 사회적 기능과 효용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신기루일 뿐이었다. 1만 원이라도 더 받으려는 욕심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컨슈머의 자기 합리화에 난도질당하고, 무례한 보험설계사들에게 시달리면서 사회초년생의 심층부에 쌓이게 되는 것은 사람에 대한 불신 뿐이었다.


나름의 준비와 노력으로 손해사정사 1,2차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어느 정도 직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직업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으로 나를 무장했고, 가능하다면 사회에도 어떤 목적으로든 이바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편견과 차별에 발목 잡힌 나에게 업무에 대한 만족과 자부심 따위가 생길 리 없었다.


남들이 나의 직업을 알지 않기를 바랐다.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그들의 민원에 저항해 보지만 결코 승리할 수 없는. 비상식과 부조리 앞에서 무기력한 돈키호테로 비치는 것이 싫었다. 나의 근로와 급여가 가치 있기를 소망했지만, 늘 자신이 없었다. 기획부서에 있든, 보상부서에 있든 영업관리자를 하든, 어느 부서라 하더라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가치를 찾지 못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현실들이 창피했다.


안타깝게도 20년을 다니는 동안 업무로  보람을 느낀 적이 없다.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와 나 사이에는 장마 이후에 급격하게 불어나는 계곡의 흙탕물이 존재했다. 가치가 다른 자들과 함께 하는 파티가 즐거울 리 없다.

보험회사의 실적은 보험설계사와 그의 가족이 채운다는 보험 업계의 우스개 말이 있다. 계약을 위한 계약이 나닌, 마감을 위한 계약이 이루어진다. 능력있는(?) 영업관리자들은 그들의 작성계약이 여럿 체결될 수 있도록 좋은 전략을 구상한다. 마치 토끼몰이처럼..

이렇게 일하면 잘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조금 성숙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직업관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나의 직업관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없으니, 다행히 나만 잘 견디면 그만이다. 기획업무를 하고, 교육을 진행하고 강의를 하는데 누군가 나에게  잘 봐달라고 디올 명품 백을 선물할 일이 없고, 어느 지역의 터널이 여름 비에 잠겨버리면서 안타까운 생명을 잃는 순간에, 외국 출장을 나가 16명의 경호를 뚫을 수 있는 리투아니아 호객꾼을 만나 쇼핑을 할 리도 없다.


그런데 내가 가진 직업윤리와 책임감으로 조금의 변화는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연간 더 좋은 교육을 기획하고, 배정된 연간 예산으로 최고의 효과를 끌어내는 날갯짓으로 어쩌면 업계에 작은 효과가 파생할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급여를 받는 사람이니 회사의 이윤에도 어떻게든 관여를 해야겠지만, 그 날갯짓이 고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금상첨화다.


핑크색이라면 뭐든지 좋아하던 3학년 꼬마 녀석은 이제 고1이 된다. 고맙게도 아빠의 무참한 직업관을 녀석은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이라는 값진 절댓값에 무게를 두고 열렬하게 아빠를 응원하고 있다. 사실 앞으로도 이곳에서 직업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조금은 더 성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평범한 직장인이라도 될 걸 그랬다.


소방관님, 응급 외상의학과 교수님,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국민의 발이 되어주시는 대중교통의  종사자들, 어린이집 선생님 같이 훌륭한 직업관을 토대로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그분들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도 조금은 더 직업관_당당하고 책임감이 있는 직업관을 가진 직장인이 돼야겠다. 사회 각 층에서 보여주고 있는 직업관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가 너무 처참하다. 나부터라도 조금 더 성숙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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