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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지계 (姑息之計)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당장에 편한 것만 취하는 일시적인 계책.

by 싱숭생숭


병동 복도에 서 있으면 위아래가 먼저 보인다.

결정은 위에서 내려오고,

그 결정이 사람을 타고 아래로 흐른다.

서명은 위로 올라가고, 한숨은 아래에 고인다.

상담실로 자리를 옮겨도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의사는 처방을 쓰고,

간호사는 몸을 붙잡고,

심리상담사는 마음을 붙잡는다.

이름표는 다르지만 피로의 결은 닮아 있다.

그리고 이 풍경 한가운데에는 어쩔 수 없이 숫자가 끼어든다.

다른 직업도 아니고, 하필 사람과 가장 밀접한 직업인 의사가 수익과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동시에 너무나도 아이러니하다.

환자의 신음과 병원의 손익계산서가 같은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쳐지고,

그 사이를 한 장의 종이가 구분한다.

한쪽은 통증의 정도를 숫자로 적고,

다른 한쪽은 ‘행위’의 값을 숫자로 적는다.

종이의 질감은 매끈하고, 미끄럽고, 잘 찢긴다.

찢기기 쉬운 건 종이만이 아니다.

사람의 체온도,

말의 맥락도,

하루의 존엄도 종종 그 옆에서 함께 찢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칸으로 나뉘고,

그 칸마다 값이 매겨진다.

행위가 늘어나면 기록이 늘고,

기록이 늘면 도장이 늘고,

도장이 늘면 피로가 늘어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돌봄”이라는 같은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데, 마지막에 남는 감각은 서로 다른 언어가 부딪히는 마찰음에 가깝지 않은가.

간호는 손발이 아니다.

환자를 붙잡는 기술자이자 시스템을 굴리는 조정자다.

통증 사정, 감염 관리, 투약 확인, 퇴원 교육, 진료과 간 커뮤니케이션.

여기에는 사람을 견디게 만드는 기술과 감각이 동시에 들어 있다.

심리상담 또한 ‘있으면 좋은 옵션’이 아니다.

상태를 평가하고, 개입의 리듬을 설계하고, 경과를 끝까지 따라가는, 마음의 공학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 속에서는 아직도 간호와 상담,

이 둘이 보조라는 이름으로 호출된다.

보조라는 말이 붙는 순간,

노동은 아래로 내려오고 책임은 위로 올라간다.

누군가의 결정이 다른 누군가의 감정노동으로 굳어질 때, 병동의 공기는 묵직해진다.

우리는 “분담”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떠넘김에 더 가까운 장면이 잦다.

같은 물인데,

위쪽의 물은 투명하고 아래쪽의 물은 탁하다.

미국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쉽게 오해한다.

거기가 더 낫다는 말이냐고.

아니다.

미국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곳에도 과로와 비용, 불평등이 산처럼 있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다.

영역의 분리가 신성불가침의 신념이 아니라,

‘서류가 움직이는 기술’로 굴러간다는 점이다.

누가 무엇을 결정하고 어디까지 책임지는지가 회의록·근무표·프로토콜·수가표의 문장들이 서로 맞물리며 증명된다.

협업은 구호로 외치지 않는다.

문서의 문장과 표의 칸에서 협업이 확인된다.

반대로 우리는 입으로는 수평을 말하지만,

양식을 열면 수직이 다시 돌아온다.

차트의 빈칸 사이로 피로가 스며들고,

“교대표”라는 글자만으로 심박이 오른다.

“3교대.”

이 말은 크루 근무제를 해 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다.

이건 어느 한 사람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문장의 배열과 칸의 순서가 사람의 자세를 정하는 기술적 풍경의 문제이지 않을까.

그 풍경의 톤을 더 어둡게 만드는 건, 때로 말의 높낮이다.

최근 뉴스에서 본 서울대 의대 교수들의 공개 발언,

“조금은 겸손하면 좋으련만…”은 단어의 높이를 통해 현장의 위계를 생생하게 드러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훈계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는 구조.

그 어조에는 의학적 안전과 공공성의 논거가 실려 있지만, 동시에 오랜 수직의 습관이 깃들어 있다.

말은 늘 현실보다 반 걸음 앞서 구조를 재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발언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 말이 어떤 높이에서 발화되었는지까지 함께 듣게 된다.

수직의 습관은 기록에도,

방송 뉴스의 자막에도,

병동의 공기에도 스며든다.

의사가 부족해 수술이 지연되고,

‘순환당직’ 같은 임시방편이 사람의 생애를 건드릴지 모른다는 뉴스가 흐른다.

어떤 밤은 긴급 호출을 받지 못해 기회가 지나가고,

어떤 낮은 담당의 사라진 빈칸을 서로 메꾸는 것으로 끝난다.

화면 아래 자막은 담담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공포를 키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인,

돌봄의 속도는 느린데, 돈의 속도는 빠르다는 사실.

그리고 그 두 속도가 충돌할 때 가장 먼저 갈라지는 건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

의사중심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제도, 그 제도를 붙잡는 기득권,

그리고 그 기득권을 붙들고 하루를 버티는 실제 사람들.

여기에서 냉담함이 생긴다.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이 문장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바꾸기 정말정말 힘들다는 걸, 다들 이미 알고 있다.

법 하나 고치자면 보고서가 산처럼 쌓이고,

관행 하나 바꾸자면 서로의 체면이 엉킨다.

무엇보다 수익의 문법이 공공의 언어에 그늘을 드리운다.

돌봄은 ‘가치’로 말하지만, 병원은 ‘가격’으로 움직인다.

이 둘은 싸운다기보다,

같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서로의 옷깃을 스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된다.

말수를 줄이고, 몸을 먼저 움직이고, 기대를 너무 크게 걸지 않는다.

나는 이 상태를 냉소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냉소는 멈춤이지만, 냉담은 체온을 낮춰 에너지를 아끼는 태도에 가깝다.

뜨거운 구호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걸 아는 사람의 생존술.

다만 그런 생존술이 오래가면,

온몸이 점점 차가워진다.

차갑게 식은 손으로 따뜻한 일을 하는 이상한 장면.

오늘의 아이러니는 아마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게 아닐까.

나는 간호와 심리상담을 같은 문장에 묶어 말하고 싶다.

몸과 마음이 하나의 사건이듯,

간호와 상담도 같은 환자의 양쪽 손잡이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밤새 통증으로 깨어 있던 사람이 있다.

약물의 조정, 욕창 예방, 통증 교육, 다음 밤을 버티게 할 두세 문장의 말.

이 모든 것이 동시에 필요하다.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불안과 우울의 강을 건너오다 겨우 앉은 사람.

위기 평가, 단기 개입, 약물의 적정성을 함께 살피는 눈,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차분한 목소리.

이 모든 것도 동시에 필요하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그림자여서는 안 된다.

각자의 전문성이 각자의 이름으로 서 있을 때,

서로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 무게는 아래로 몰린다.

이름은 어디에 남는가.

차트에 남고, 표에 남고, 서명에 남는다.

그래서 문장의 배열이 중요해지고,

칸의 순서가 중요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다루는 일의 품격이 종종 양식의 품질에서 드러난다.

어떤 양식은 사람을 재촉하고,

어떤 양식은 사람을 붙잡는다.

같은 내용인데도, 어떤 표현은 누군가를 “보조”로 만들고, 어떤 표현은 “동료”로 만든다.

나는 이 차이를 목격하곤 한다.

그래서 더 냉담해지는 날이 있고,

더 말수가 줄어드는 밤이 있다.

말수가 줄어들수록 심장은 조용해지고,

조용해질수록 책임은 무거워진다.

이상한 등식이다.

말이 사라지면 일이 남고,

일이 남으면 이름이 지워진다.

의사가 수익과 결박되어 있다는 아이러니를 다시 생각한다.

사람을 살리는 언어와 돈을 버는 언어는 원천적으로 적대적이지 않다.

다만 근본적으로 속도가 다르다.

돈의 언어는 빠르게 흐르고, 돌봄의 언어는 더디게 스며든다는 점이다.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재촉할 때, 현장은 소음을 만든다.

“빨리”와 “천천히”가 싸우는 동안,

환자는 중간에서 시간을 잃는다.

그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는 것은 대개 아래층의 사람들이지 않을까.

간호와 상담의 시간은 그래서 자주 무급의 정서로 흘러가고, 무급의 정서는 쉽게 고갈된다.

고갈은 곧 무기력이고, 무기력은 곧 번아웃이다.

번아웃은 그 자체로 병동의 조명이 된다.

어둡지 않은데, 따뜻하지도 않은 조명.

그런 빛 아래에서 사람은 자신이 기계가 된 것처럼 느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해결책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의 성급한 정답이 또 다른 정답을 눌러버리는 장면을 이미 많이 봤다.

오히려 문제를 정확히 묘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이 기울기의 원인을 빠짐없이 가리키는 일.

의사중심주의라는 말이 너무 큰 우산이라면,

그 우산의 뼈대가 무엇인지 하나씩 불러보는 일.

돈의 속도와 돌봄의 속도가 다르다는 사실,

언어의 뉘앙스가 구조를 은근히 고착시킨다는 사실,

서명이 권한을 위로 올리고 한숨을 아래로 내린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

이 ‘이미 알고 있다’라는 사실이 가장 무거운 진실일지도 모른다.

알지만, 기울기는 쉽게 바로서지 않는다.

흙탕물은 가만히 둔다고 가라앉지 않는다.

계속 흔들리는데, 이상하게도 더 탁해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정확한 냉담을 선택한다.

과장된 희망을 끌어다 쓰지 않고,

뼈가 드러나는 문장만으로 풍경을 적어둔다.

돌봄의 무게와 수익의 그림자가 어떻게 겹치는지,

그 겹침이 어떻게 사람의 체온을 빼앗는지,

그 체온이 빠져나간 자리에 어떤 침묵이 자리 잡는지.

침묵 속에서 간호는 여전히 통증을 묻고,

상처의 색을 보며, 퇴원의 시간을 헤아린다.

상담은 여전히 밤의 깊이를 묻고, 말의 속도를 맞추며, 다음 주의 자리를 비워둔다.

의사는 여전히 최종 결정을 쓰고, 위험을 가늠하며, 책임의 끝을 떠맡는다.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한다.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면서도,

모두가 조금씩 닳아간다.

닳아가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풍경의 본모습을 본다.

사람을 다루는 일의 한가운데에 숫자가 들어와 있고,

숫자의 가장자리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나는 여전히 믿는다, 라고 쓰려다 멈춘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오늘의 공기를 버티기에는 너무 가볍게 들리기 때문이다.

대신 이렇게 적어둔다.

기록은 풍경을 배신하지 않는다.

문장과 칸, 서명과 숫자, 그 냉정한 조합 속에 우리 사회의 자세가 고스란히 담긴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고,

어디까지를 누가 책임진다고 적는지,

그 미세한 선택들이 사람의 체온을 빼앗기도 하고 돌려주기도 한다.

미국을 이야기해도 좋고, 한국을 이야기해도 좋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더 옳으냐가 아니라,

어떤 문장이 이 풍경을 정확하게 붙잡느냐이다.

오늘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권한과 책임은 같은 무게여야 한다는 말,

역할의 분리는 배타가 아니라 덜어내기의 기술이라는 말, 그리고 냉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의 자세라는 말.

책상 한쪽에 그 세 문장을 적어두고,

다시 종이 두 장을 마주 본다.

한 장은 신음이고, 한 장은 숫자다.

두 장의 종이는 여전히 같은 질감이다.

매끈하고, 미끄럽고, 잘 찢긴다.

하지만 찢긴 자리로도 문장은 이어진다.

오늘은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https://m.youtube.com/watch?si=FKnlt1hRYSpAWwBG&v=pnnLlQlzqWE&feature=youtu.be

https://m.youtube.com/watch?si=fiVWNgNV79gtT7xI&v=nxgv2vrblt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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