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평범함 속에서 찾는 진실한 도리.
원래 교실은 느리게 바뀐다.
하지만 2023년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의 2년은 예외적이었다.
사회는 분노했고, 제도는 빠르게 움직였다.
‘교권보호 4법’(교육기본법·유아교육법·초중등교육법·교원지위법 개정)이 통과됐고, ‘정당한 생활지도’를 아동학대와 혼동하지 않도록 명문화했으며, 교육감의 신속 의견제출, 무분별한 직위해제 금지 및 악성 민원과 무고의 교육활동 침해 편입 같은 장치들이 붙었다.
2025년에는 교육부가 현장 운영판으로 쓸 「2025 교육활동 보호 매뉴얼」을 내렸으며,
교사는 학교·교육지원청 차원의 대응 체계 속에서 일하도록 구조가 손질되었다.
말하자면, 책임과 권한을 개인이 아니라 기관에 다시 묶는 방향의 수정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법과 매뉴얼이 생겼다고 곧장 교실의 공기가 바뀌지는 않는다.
서이초 건 자체만 놓고 보면, 2023년 11월 경찰은 학부모 등에게 “범죄 혐의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사건의 법적 결론과 사회적 파장이 서로 어긋난 채로 남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 사건이 교권·민원 구조의 취약점을 전국적 의제로 부상시킨 기폭제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나의 사건이 제도를 움직였지만,
제도가 곧 문화가 되는 데에는 더 긴 시간이 든다.
실제 제도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2025년 9월 8일, 울산에서 교육감이 학부모를 ‘교육활동 침해’ 혐의로 직접 형사 고발한 사례가 나왔다.
지속적 부당 민원으로 교사가 휴직에 들어가자,
동료 교사들과 교육청이 나서서 기관 차원의 책임을 행사한 것이다.
상징적으로 정말 중요한 첫 풍경이다.
“악성 민원은 더 이상 개인 담임이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실제 사건 처리로 번역된 장면이라 그런게 아닐까.
이 시점에서 ‘교권침해’라는 단어를 다시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법률과 매뉴얼이 규정하는 교육활동 침해의 주체는 학생과 보호자이며,
무고 및 공무집행방해 등도 침해 유형에 포함된다.
학교가 창구를 일원화해 ‘민원대응팀’ 같은 기관 단위로 응대하고, 교육지원청의 교권보호위원회가 개입하도록 구조를 바꾸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개인 교사가 감정·법률·행정까지 다 떠맡아 번아웃에 이르는 일을 줄이려면,
책임의 창구를 사람에서 절차로 옮겨놓아야 한다.
그래서 문서의 문장과 칸이 중요해진다.
그 칸 안에서 무엇을 언제 기록했는지가 교실의 질서를 지켜주지 않을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요즘 부모가 너무 과한 거 아니냐?”
이 질문을 성급한 세대 일반화로 밀어붙이면 논의를 망친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의 부모 세대는 과거 가정에서 겪은 상처와 좌절을 꽤 선명히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폭언과 방임, 권위주의와 냉랭함이 일상이었던 집을 통과해 어른이 된 이들이,
자기 아이만큼은 그렇게 다치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그게 맞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좋은 의지가 교실에서 ‘즉각 개입’과 ‘지속적 민원’의 형태로 변형될 때다.
과잉은 호위를 가장한 공격이 되고,
삶의 규칙은 사랑의 속도에 밀린다.
부모의 아동기 역경(ACE)이 현재의 양육 스트레스와 과잉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국내 연구들은 이 불편한 연쇄를 조심스럽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 이 글은 ‘보호하려는 마음’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공적 절차로 변화시키고, 아이를 사회와 연결하는 기술로 바꿀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의 뿌리는 가정교육에 닿아 있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아이의 판단 기준을 만든다.
아이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매번 어른이 대신 전화를 걸고,
학교에 즉답을 요구하고,
교사의 생활지도를 아동학대로 의심하는 루틴이 반복되면,
아이는 ‘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즉시 개입해 해결하게 하는 것’으로 학습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정작 비판받는 대상은 아이가 된다.
아이가 또래를 무시하거나 작은 갈등에서 쉽게 경멸의 표현을 꺼내는 태도는 어디서 왔을까.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아이의 절대적 우상화’로 변질되면, 비교와 경멸이 뒤따르기 쉽다.
나는 부모가 아이를 잘 챙기고 감싸는 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마음을 ‘우상화’의 방식으로 과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상화는 아이를 현실과의 접촉에서 분리시켜,
결국 아이 자신을 더 약하게 만든다.
사랑에도 속도가 있고,
무엇이든 과하면 돌아온다. 과유불급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먼저 이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
바로 교사가 상담사가 아니라는 걸.
왜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을까 싶다.
대다수 교사는 전문상담 훈련을 깊이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교실은 매일 정서·행동 문제, 부모-자녀 갈등, 또래 관계 손상, 가정의 빈곤·폭력의 그림자를 교사 책상 위로 밀어 넣는다.
이 간극을 메우려고 정부는 ‘교원 마음건강 회복지원 방안’을 내고 심리검사·상담·치료 지원을 제도화하고 있다.
교권침해 직통번호 1395를 열고,
카카오톡·전화·예약 시스템을 연결해 심리·법률·행정을 한 번에 붙여주는 것도 같은 취지다.
“교사는 수업을 하고, 기관이 민원을 처리한다”라는 원칙이 비로소 형태를 갖추는 중이다.
그럼에도 현장의 체감은 매우 더디다.
설문과 보도는 교사들의 우울·불안 지표가 여전히 높다고 말한다.
이 괴리는 제도가 효능을 갖기까지 밟아야 할 문화적 단계가 많다는 방증이다.
서이초 사건을 말할 때는 감정보다 문장이 앞서야 한다.
기록은 분명하다.
2023년 11월, 경찰은 “범죄 혐의점 없음”으로 수사를 마감했다.
하지만 그 문구가 곧장 ‘학부모의 행위가 정당했다’라는 증명이 되진 않다는걸 모두가 알 것이다.
형사책임의 성립 여부와,
학교 현장에서 되풀이되는 구조를 손보는 일은 층위가 다르다.
그래서 이후의 손질은 사람을 가르는 판정이 아니라 절차를 정비하는 설계로 향했다.
정당한 생활지도를 곧바로 형사 사안으로 비약하지 않도록 멈춤장치를 달고, 민원은 담임 개인이 아니라 학교장이 책임 있게 받도록 창구를 고정했다.
판단의 무게가 실리는 교권보호 심의는 학교 밖(교육지원청)으로 옮겨 이해관계의 거리를 확보했다. 2024~2025년 사이 교육청 안내와 현장 자료는 ‘누가 무엇을 교육활동 침해라 부를 것인가’를 더 촘촘히 정리하며 용어를 통일해 나갔다.
언어가 정리되면,
교실은 싸움의 무대가 아니라 수업의 장소로 돌아온다.
9월 울산의 고발 장면은 이 원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한 학부모의 반복적 압박과 악성 문자가 개인 교사의 인내심 시험으로 소비되던 시대는 끝나가고,
이제는 학교와 교육청이 기관의 이름으로 전면에 선다.
공무집행방해·협박·무고 가능성을 법의 틀에서 점검하고, 필요하면 고발까지 이어가는 동안 교사는 병가·휴직 등 회복 절차를 밟는다.
학급의 안정은 시스템이 맡아야 한다.
핵심 문장은 이거 하나다.
“개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절차가 움직인다.”
그 한 줄이 지켜질 때,
교사의 우울과 불안은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조직 설계의 문제로 위치가 바뀌고,
제도는 ‘누가’의 공방 대신 ‘어떻게’의 길을 넓힌다.
그래도 남는 물음이 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냥 아이를 위해서인데.”
그렇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다.
그래서 더더욱 절차가 필요하다.
절차는 사랑을 부정하는 장치가 아니라,
사랑을 사회와 연결해 주는 장치다.
교실에서 발생한 충돌은 먼저 학교의 규칙과 기록 위에서 다뤄져야 한다.
부모의 보호 본능은 그 다음에,
그 규칙을 따라 들어와야 한다.
절차를 밟지 않는 보호는 곧장 다른 아이의 권리를 침해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침해의 화살은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돌아온다는 것이다.
교실은 ‘우리 아이만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간’이기 때문이라 그런걸 왜 모르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의 변화가 ‘교사 vs 부모’ 구도를 강화하리라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를 사회로 이끄는 방식’을 성숙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본다.
과잉을 멈추고,
공적 장치에 연결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
즉, 사랑을 절차 위에 올려놓는 훈련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출발점이었던 문장을 다시 적는다.
“결국 이런 건 가정교육에서 기반된 것이기에 부모의 행동에 좌우될 수 있지만, 정작 비판받는 건 아이들 아닌가.”
나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그렇다고 아이를 잘 챙기고 감싸는 마음 자체를 탓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우상화’는 경계하자.
우상화는 비교와 경멸을 낳고, 경멸은 교실을 찢는다.
아이는 사회와 부딪쳐 배우며 자란다.
그 접촉을 막는 사랑은 결국 아이를 약하게 만든다.
그래서 제도는 부모를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공적 절차와 교사의 전문성에 접속시키려는 것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돌아온다.
중용지도, 그 말이 지금 교실에서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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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youtube.com/live/skyfXB3uC2s?si=Goakwa5mhlprx5V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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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youtube.com/watch?si=T67z6a72rZHY7z4E&v=Pdpbp3rhzu4&feature=youtu.be
학생은 학생대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힘든 것 같아요.
학생 관련해서 글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뒤 작성해보려고 해요.
모두들 항상 고생하십니다. 그리고 항상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