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아들 사용설명서 [일상 편]

[함께 살아가는 시간]

by 신지 온

"보조 가방 있어?"

오늘은 아들 체육대회가 있는 날이다.

어제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보조 가방을 건네주면서

"엄마 메려고 산 건데, 안 샀으면 어쩔 뻔했어~" 하니

"아무거나 가지고 가면 되지~" 한다.


딱 아들 성향이다.

타고난 기질인 건지 남자아이라 그런 건지 뭐 둘 다겠지만 딱히 물욕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가끔 입을 바지가 없네~신발이 작네~라며 소리를 내지

본인 것 안에서 어떻게든 해결하는 아이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아들의 여러 장점 중 하나이다.


조금 있으니 또 슬쩍 와서 무언가를 찾는다.

"텀블러 없어?"

먹을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 대신 모든 것에 아끼고 있으니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없는데~"

"응~ 알았어"

역시 쿨하게 돌아선다.


"갔다 올게" 하며 현관 앞을 나서는데 보조가방을 덜레덜레 들고 있다.

그래도 신경은 쓰였는지 "괜찮겠지~" 하며 나선다.


"아들 사랑해~ 재미나게 잘 놀다 와~"

체육대회 반 티를 입은 아이는 늘 그렇듯 무심하게 나가는데

엄마가 더 신이 나서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엄마 오늘 쉬는 날인데, 이따 놀러 가도 되지?"

장난 섞어 물었더니 지금까지 차분했던 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눈이 똥그래진다.

"엄마가 왜 놀러 와~"


이럴 거야... 아들...



토요일 아침, 축구를 마치고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들어온 아들은

친구네 집에서 자기로 했다고 통보하듯이 전달하고는 집을 나섰다.


다음 날, 일어나면 전화하겠다는 아이는 2시가 넘어서야 전화를 했고

지금은 가족 모두 나와 있으니 저녁 먹기 전에는 들어오라고 했는데

8시가 넘어도 연락이 없자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표정은 일그러지고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씩씩대면서

"배고파서 손이 다 떨리네~" 하자 신랑이 앞에서 한마디 한다.

"아들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그런가.... 맞는 것 같다.


벨 소리가 들리고 아들 모습이 보이자

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먼발치에서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들어온다.


그래,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잖아..


일단 먹이고 보자 싶어 간신히 화를 눌러 담고 식탁에 앉았는데...

어머!!

평소엔 잘 먹지도 않던 애가 오늘따라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잔뜩 화가 나 있던 엄마는 어디 가고

고기도 잘라주고 상추도 모자랄까 씻어서 올려주고

세상 자상한 엄마가 앞에 앉아 있다.


"아들~ 한마디 하려 했는데 잘 먹는 모습 보니 너무 예쁘네~"


하루 종일 굳어있던 마음이 맛있게 먹는 자식 앞에서 이렇게나 쉽게 말랑해지는 걸 보면

부모 마음이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너란 남자...미워할 수가 없다...



중2는 생각보다 아니 기대 이상으로 잘 흘러가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이게 사춘기인가.. 싶은 날조차 없었다.

이 모든 공을 난 3개월 전부터 시작한 복싱과 축구의 덕으로 돌리고 싶다.


남자아이는 역시 운동이 답인건가...


아들은 운동을 한 이후로 눈에 띄게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뼈만 앙상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제법 근육이 탄탄하게 붙고

잔뜩 굽어 있던 등도 조금씩 반듯해지고 있다.


말투도 부드러워지고 부모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차분해졌다.


동생과의 사이는 또 어떤가..

며칠 전 딸아이 생일날,

노래를 부르던 딸이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오빠 얼굴을 손으로 때리는 참사가 벌어졌다.

순간 모두가 놀랐지만 아들은 괜찮아~하고 허허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뭐 하나~하고 보면 동생 방에서 같이 게임도 하고 장난도 치고

때로는 안아주기도 하면서 현실남매가 아닌 로망남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 아빠는 마냥 흐뭇하다.



학교 성적이 바닥을 기어도 괜찮은 이유,

친구들과 사이가 좋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며 예의가 바르다는

가정통신문이 더 마음에 와닿는 이유이다.


"복싱 잘 다녀와~아들, 사랑해!!"

이대로만 자라 주길 바라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오늘도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복싱 가야 되는데 옷이 없어... 안 빨았어?"

"아~검정은 아직인데.."

"아빠와 나는 검정 옷밖에 없는데 그걸 안 빨면.."

검정 옷이 전부인 신랑과 아들한테 왜 매번 빨래를 안 하냐고 쓴소리를 듣고 있는 나다.


그렇다고 해도 몇 개 안 되는 옷 때문에 그 큰 세탁기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 리가... 검정 옷이 몇 개나 되는데.."

난 안방과 아들 방을 돌아다니면서 검정 옷을 찾았지만 없다.

정말 몽땅 다 세탁실에 들어가 있을 줄이야...


청소년기 아이들은 옷에 예민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미안해 아들~ 오늘만 다른 옷 입고 가면 안 될까?" 하며

내 옷 중 그나마 큰 검정티를 들어 보이니 아이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하고 웃는다.

보여주는 나도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고 만다.


나는 "오늘만 하얀색.." "오늘만 대충.."이라며 말을 얼버무리며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고

아들은 조용히 세탁실로 들어가 "페브리즈를 뿌리고 잠깐 널어두면 괜찮겠지" 하며

빨래 바구니에서 뒤적뒤적 본인 옷을 꺼낸다.


킁킁 냄새 한번 맡더니 "이거 맞아?" 하며

나에게도 맡아 보라며 코앞에 갖다 대는 짓궂은 아들.

그러고는 옷이 다 젖도록 페브리즈를 연신 뿌려댄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난다.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읽어서일까. 타고난 성향이 그런 걸까.

어느 쪽이건 늘 본인 할 일만 하는 아들의 저런 묵묵함이 난 참으로 좋다.



어제저녁도 먹지 않고 6시부터 누운 아들은 다음 날 9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냉장고를 뒤적뒤적하더니 우동을 꺼낸다.

15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엄마~우동 끓여줘~"

"엄마 이제 막 씻으려고 하는데 네가 하면 안 돼?"

"음..할 수 없지 뭐" 하고 살짝 웃어 보이더니

아들은 곧바로 냄비를 꺼내 조리를 시작한다.


요즘은 아들의 무심한 한마디에 혼자 서운해하고 혼자 속상해하던 날들이 많았는데

주방 앞에 서서 물을 끓이고 있는, 이제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아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벅차오른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지금 이 마음을 표현해보고 싶은 생각에

아들 말대로 하자면 '굳이' 낯간지러운 말을 꺼내본다.

"아들~ 고마워"

"뭐가?"

"건강하고 밝게 잘 자라줘서~"

"응~"

항상 응이다. 사랑해 해도 응~ 고맙다 해도 응~

그 한마디에 중2 남자아이가 할 수 있는 모든 애정 표현이 다 들어있는 것 같아서

그게 또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언제 이렇게 컸니..


"우동 참 맛있네~" 하며 두 봉을 순식간에 해치운 아들은

늘 그렇듯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시작했지만

터져야 할 내 속은 웬일로 편안했다.


그냥 오늘은 다 예뻐 보이는 날이랄까..

밝고 건강하게 자라준 아들이 그저 고마운 오늘이다.



아들이 어릴 적엔 태권도 공연이며 학교 체육대회로 분주하더니

이제는 딸아이의 피아노와 댄스 공연을 보러 다닌다.

자식이 있으니 인생이 참으로 다채롭게 흘러간다.


공연장에는 끼와 재능이 넘치는 아이들이 참 많다.

어쩜 저렇게 잘할까.. 감탄하며 무대를 보다가 옆을 보니

눈이 빠져라 게임을 하며 "내가 꼭 와야 되는 거였어?"

하며 볼멘소리를 하는 아들이 앉아 있다.


나도 엄마인지라 우리 아이들도 저런 끼가 있었으면....하고 잠시 바랐다가도

애초에 엄마, 아빠가 그런 게 없으니 자식들이 있을 리가 없지 체념하다가

이게 없으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 하며 아쉬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집에 오는 길, 버스 안..

아이들은 그대로인데 괜히 마음이 심란해져서 창 밖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멀찍이 서서 휴대폰만 보고 있는 아들이 영 못마땅하다.


집 앞에 다다르자 아들이 슬며시 여동생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건다.

"아까 그 춤 잘 추던 언니들 있지?"

난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들어보니 "너 그 언니들이랑 친해?"

..............

푸하하하

오는 내내 무겁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한순간 풀려버린다.

종일 폰만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언제 또 그 언니들은 본 거니?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모에게도 아이 자신에게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생에는 각자의 방향과 속도가 있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아직 출발선에 서 있는 아이들이

나 또한 마흔 넘어 깨달은 것을 공감할 리 만무할 터,

그저 나는 묵묵히 아이들 곁을 지키며

조금 더디게 가더라도, 조금 돌아가더라도

괜찮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조용히 응원해 주고 싶다.


조금 느려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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