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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kiN Dec 03. 2024

목욕탕 좋아하세요?

루틴이 되어버린 어느 하루.

 어느 날, 로맨틱 코미디 만화를 보던 중에 사우나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사우나의 정석이라며 나온 방법은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우나 10분, 냉탕 10분, 외기욕 10분으로 3회 사이클을 행하면 천상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것을 보고 나는 책을 덮고 검은 비닐봉지에 속옷과 여행용 세면도구를 넣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탕을 안 간 지는 오래되었다. 고등학생 때까지야 집에 있으니 아버지와 주말에 목욕탕을 가는 게 루틴이었으나 성인이 된 후에는 집에 가는 횟수도 몇 번 안 될뿐더러 친구들 만나기 바빠 아버지와 목욕탕을 갈 생각을 안 해봤다. 그래도 명절이나 기회가 되면 드문드문 갔던 기억이 있다. 연에 두세 번 목욕탕을 가다 보니 때가 국수처럼 나와 아버지께서 기겁하신다. 그래도 매일 샤워하고 냄새 안 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행동력이 있는 편은 아닌데 어느 부분에서 꽂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면도구와 속옷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가지고 털레털레 차에 올랐다. 그 당시 살던 동네에는 도보권에 목욕탕이 없었다. 생각보다 목욕탕이 많이 없었다. 폐업한 곳이 많았다. 아마도 코로나로 타격을 입은 것이겠지.


  차를 타고 10분이 채 안 걸리는 목욕탕에 도착했다. 목욕비가 7천 원이다. 카드는 8천 원. 항상 아버지께서 계산하시고 먼저 들어가 계셔서 금액에 대한 인지는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돈으로 내려고 보니 좀 아깝다. 순대국밥을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돈인데 말이다.


 신발장 키를 받아서 신발을 넣고 카운터에 계시는 분께 신발장 키를 건네면 옷장 키를 받는다. 뭔가 어색하고 어설프다. 그리고 주섬주섬 혼자 옷장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데 문득 생각이 든다. 혼자 목욕탕에 온 건 처음이다. 고로 등을 밀어줄 사람이 없다.


 아차 싶었다. 패착이다. 사우나를 하러 온 거긴 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목욕탕에 왔는데 때도 안 밀고 그냥 갈 수가 있나 싶다. 일단 탕에 들어가서 고민을 좀 하면서 두리번거려 본다. 탕 옆에 세신 하는 곳이 있다. 가격을 보니 2만 원이다. 탕의 열기에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천장을 보면서 나름대로 가성비를 따져본다. 목욕비 7천 원, 세신 2만 원, 도합 2만 7천 원.  나가서 바나나우유 사 먹으면 대략 3만 원.


 결심했다. 몸이 충분히 불려졌다 생각될 때쯤 탕에서 나와 세신 하는 곳에 가니 동그란 벨이 있다. 누르면 오시나 보다. 꾹 누르니 밖에서 요란한 벨이 울린다. 세신사 한 분이 목욕탕 안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신다. 나는 몸이 마를까 봐 재빨리 다시 탕으로 들어간다.

 "2만 원짜리 세신을 허투루 받을 순 없지."


 세신사 분의 제스처에 따라 자세를 바꿔가며 세신을 받는다. 조금 부끄럽다. 너무 많이 나온다.

 "어이구 시원하시겠어요~ 허허."

 세신사 분의 너털웃음과 함께 나의 부끄러움은 더 커져간다. 조금만 참자. 이 수치가 지나가면 말끔한 내 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비누칠과 함께 세신이 끝났다.


 세신이라는 것은 어릴 적 때를 밀기 싫어서 아버지와 씨름을 하다가 결국 포기하신 아버지께서 세신사라는 용병을 불러 나는 꼼짝없이 잡혀 때를 밀려야만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자유경제시장의 하나의 일원으로서 내가 번 돈으로 세신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자, 이제 실전에 들어가야 한다. 사우나, 냉탕, 외기욕 총 30분을 하나의 사이클로 하여 총 세 번.


 첫 번째 사이클을 실행하고자 습식 사우나방에 들어갔다. 무려 '보석방'이다. 벽에 알록달록한 돌들이 여기저기 박혀있다. 모래시계를 돌려놓고 10분을 기다리는데, 이 또한 억겁의 시간이다. 모래시계를 무섭게 노려보지만 야속하게도 모래는 일정한 양과 속도로 내려간다. 10분의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냉수마찰을 할 시간이다. 심장이 놀랄 수 있으니 가슴에 냉수를 먼저 적셔주고 조심히 들어간다. 사우나의 열기에 흐물흐물해졌던 몸이 다시 오그라든다. 피부는 닭살이 오돌토돌 돋았지만 기분 좋은 냉기이다. 시간이 지나니 몸이 으슬으슬하다. 그래도 시간을 채워야 하니 수중 스쾃을 한다. 이제 10분이 지났으니 외기욕을 할 차례다.

 

 만화에서는 외기욕을 하는 야외공간이 있었으나 대한민국 대중목욕탕에는 흡연실 말고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은 없다. 하지만 남탕에는 썬베드가 있다. 근데 이걸 썬베드라고 해야 하나? 목욕베드? 어릴 때 이것을 쓰는 아저씨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가 알몸인 목욕탕이지만 민감한 곳을 훤히 내놓고 어떻게 저리 평온하게 잠을 잘 수 있는가?


 그래도 사이클을 마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한다. 저기에 누워 10분을 쉬어야 한다. 수건을 하나 더 가져와 썬베드 등판에 깔고 내가 소지하고 있던 수건의 용도를 가지고 고민했다.

 '얼굴을 덮어야 하나? 아니면 다른 곳을 덮어야 하나?'

어디를 덮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베드에서 누운 지 10분 다시 두 번째 사이클을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첫 번째 사이클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잡념이 사라졌다. 세 번째 사이클이 끝났을 때는 몸이 노곤노곤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피곤한 같으나 몸은 가볍고 정신이 맑아진 느낌이었다. 그러고 집에 와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마치 죽은 듯이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장장 3시간을 목욕탕에 있었다. 그때 당시 내 나이 서른둘, 이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달목욕권을 끊으시고 목욕탕만 가시면 함흥차사이던 우리 엄마. 내가 대학입시 가, 나, 다군 다 떨어지고 추가합격 발표를 기다리며 전화기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날에도 엄마는 목욕탕에 가셨다. 나는 오전에 추가합격 전화를 받고 예비순번이 넘어가기 전에 등록금을 입금하기 위해 추운 겨울날 슬리퍼를 거꾸로 신고 목욕탕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카운터 아주머니께 등록금 입금해야 하니 우리 엄마를 불러달라며 외치던 스무 살의 그때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반차를 내고 목욕탕에 가는 루틴을 만들었다. 요일은 수요일, 시간은 오후 한 시부터 네시까지로 정했다. 내가 가는 목욕탕은 그때 사람이 제일 없었기 때문에. 목욕탕에 들어가면 샤워를 먼저 하고 바로 사우나, 냉탕, 외기욕을 3번 한다. 그리고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싶을 때 온탕에서 휴식을 조금 취하다가 세신을 받는다. 그렇게 2년간 루틴과 목욕 노하우는 점점 발전해 갔고 목욕 후의 만족도 역시 나날이 높아져갔다.


 하지만 나는 6개월 동안 목욕탕에 가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2세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뚝딱하면 생길 것 같았지만 한 생명이 찾아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2세를 준비하는 데 있어 저해가 될 만한 요소들은 일절 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나도 2세와 함께 목욕탕을 갈 날을 위해.


 잔잔한 목욕탕 속 안개가 천장에 이슬로 맺혀 다시 목욕탕으로 떨어지는 똑... 똑... 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잠기고 멍해지는 몽환적인 장면과 분위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하지만 시끌시끌한 주말 아침에 안 씻으려는 아들과 함께 씨름하는 모습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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