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엄마도 반짝일 수 있다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절대 죽지 않아. 산 채로 생매장되어서는 나중에 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다니엘 씨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멍청하게, 에? 하고 대꾸하긴 했으나 이어서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서 신사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덧붙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한 말이에요. 유림 군. 앞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표현해요. 추해지기 전에요.”
그러더니, 잠깐만, 하고는 복도 끝으로 멀어져 간다. 동시에 술래잡기라도 하듯 이번엔 썬이 뿅 하고 나타났다. 내가 물었다.
“어쩌다 사고가 난 거야?”
녀석은 나에게 몸을 기대고 앉는다.
“잘 가고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아무튼 나는 멀쩡해.”
“그렇지만 네가 정신을 잃은 상태로 응급실에 있다고 연락을 받았어.”
그 말에 썬이 주변을 살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넘어지고 좀 창피해서 계속 기절한 척하고 있었지. 근데 다니엘 씨한테는 형이 연락한 거야?”
혹시라도 책망을 받을까 봐 나는 그간의 어려움부터 토로했다.
“그럼 어떻게 해? 이 시간에 엄마를 깨울 수도 없잖아. 그럼 아버지까지 이 상황을 전부 알게 될 텐데. 나도 죽을 맛이었다고.”
썬이 반색하는 투로 응답했다.
“정말 잘했어. 엄마는 날 보자마자 눈물부터 쏟았을 테고 아버지는 병원비부터 계산한 다음 엄청 화냈겠지. 앞으로 2주 정도만 조심하면 되니까 집에서는 형이 좀 도와주라. 어차피 저녁식사 때만 마주치잖아.”
“엄마한테까지 숨기려고?”
“알면 괜히 걱정해.”
녀석이 반 깁스한 다리를 툭 툭 치며 대답했다. 나는 몇 번 헛기침하다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줌머 일은…
“그 얘기라면 꺼내지도 마. 생각 안 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무자비한 썬은 단칼에 잘라버린다. 그때 우리 뒤로 불쑥 등장한 다니엘 씨가 처방전 서류를 내밀었다.
“내일 아침에 약국부터 들러요.”
나는 썬 대신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저… 근데, 돈은…”
“수납은 다 마쳤으니 걱정 말고 집에 가서 푹 쉬어요. 내가 차로 데려다줄까요?”
그 물음에도 내가 대표로 답했다.
“아니에요. 이미 폐를 너무 많이 끼쳐서요. 택시비 정도는 있습니다.”
다니엘 씨는 양손을 트렌치코트 주머니로 찔러 넣었다.
“그래요. 유림 군, 반가웠어요. 유선 군, 빨리 쾌차하길 바랄게요.”
신사가 천천히 퇴장한다. 덩그러니 남은 우리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조금 늦은 인사를 전할 뿐이었다.
우려와는 달리 썬은 일주일 만에 반 깁스를 풀고 걸어 다닐 정도로(물론 조금 절뚝이 기는 했다) 상태가 회복되었다. 물론 나의 도움으로 부모님께 발각되는 일도 없었다.
여름의 기세가 농염해진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세상의 모든 색채들이 차츰차츰 선명해지는 시점이라 심지어는 후덥지근한 바람마저도 아쿠아 유리처럼 반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며 침대에 누워 있는데 썬이 내방으로 찾아왔다. 부상 때문에 한동안은 방문이 뜸했기에, 웬일이야? 하고 물었지만 썬은 내 옆으로 몸을 던질 뿐이었다. 줌머가 떠난 날부터 녀석은 말수도 의욕도 증발해버린 것 같다.
“오늘 다니엘 씨, 출국 날인 거 알아?”
나는 그렇게 묻고 회전의자로 이동했다.
“알아. 근데 이미 너무 늦었겠지?”
“뭐가?”
“전부 다.”
전부 알 수 없는 말투 성이다. 나는 굼뜨게 돌며 말했다.
“겸사겸사 다니엘 씨한테 전화라도 해볼까? 병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했잖아.”
썬은 뒤통수만 긁적일 뿐 반대할 의사는 딱히 없는 것 같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가 통화를 시도한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 유림 군! 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다니엘 씨.
“안녕하세요, 오늘 출국이시죠?”
“맞아요. 안 그래도 지금 막 유림 군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혹시 시간 될 때 집 근처의 ‘B팩토리’라는 곳에 들러보지 않겠어요?”
B팩토리라면 내 중학교, 그러니까 현재는 썬의 학교 정문 앞에 위치한 오래된 바이크 정비소다. 집에서는 도보로 십분 거리.
“거기는 바이크 정비소 아닌가요?”
“네 맞아요. 그곳에 내 스쿠터를 맡겨놨어요. 중고라도 괜찮다면 유선 군이 대신 타 줬으면 좋겠는데.”
스쿠터요?! 하고 내가 놀라자 썬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무슨 얘기냐고 묻는다. 나는 한 손으로 마이크 홀을 막고서 속삭였다.
“다니엘 씨가 자기 스쿠터를 너한테 주겠대. 중고인데 괜찮으냐고 물어보네.”
녀석은 양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만들어 미친 듯이 휘둘렀다. 내가 마이크 홀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실은… 동생도 지금 옆에 있는데 통화해보실래요?”
그러자 이번에는 양팔로 크게 엑스자를 만들어 격하게 흔드는 썬.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와중에 다니엘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사실 몇 시간 뒤면 출국이라 좀 바쁘네요. 아무튼 정비사에게 내 이름을 대면 잘 안내해줄 거 에요. 이만 끊을 게요. 둘 다 몸 건강하게 잘 지내요.”
얇은 유리의 슬라이드 도어를 드르륵 열고 썬과 내가 B팩토리 안으로 들어섰다. 늘 지나치는 등하교 길목이었지만 직접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다.
실내는 마치 기름 유출사고라도 터진 바다 같았다. 벽, 천장 할 것 없이 거뭇거뭇한 기름때 천지다.
“무슨 일이냐?”
몽키 스패너를 든 콧수염의 정비사가 구석에서 바이크를 수리하며 물었다. 머리에 쓴 녹색 두건과 청색 작업복이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다. 내가 대답했다.
“스쿠터를 맡겨놨는데요. 다니엘 씨 가요.”
그러자 정비사는, 아하, 하고는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다. 잠시 뒤 은회색의 스쿠터를 끌고 나왔다.
옆면이 둥근 유려한 곡선미의 스쿠터였는데 동그란 헤드라이트가 특이하게도 프론트팬더에 부착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백미러도 없고 손잡이는 마치 자전거 손잡이 같았다. 리어 카울링에 부착된 타이어를 보며 내가 떠름한 표정으로 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건 너무 낡지 않았어? 제대로 굴러가긴 하려나.”
그러나 썬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형. 이거 베스파 125 V31이야.”
나는 기절초풍했다. 그 모델이라면 녀석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으니까.
“뭐?! 설마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이 탔던…?”
녀석은 자지러질 듯 목청을 높였다.
“그래! 게다가 흔해 빠진 레트로가 아니라 오리지널이라고!”
정비사가 스쿠터 열쇠를 건네며 말을 이어받는다.
“어린 친구가 잘도 아는구먼. 배기량이 98cc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지. 이런 모델이라면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고이 모셔두겠어. 혹시 나한테 팔 생각은 없겠지?”
“전혀요.”
단번에 거절한 썬이 열쇠를 홱 낚아챈다. 정비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조심히 타라고. 내가 손볼 수 있는 건 전부 손보고 청소까지 완벽히 했지만 고장 나면 교체할 파츠가 없으니까. 계산은 방금 다 하고 가셨으니 그냥 가도 돼.”
“방금이요? 정확히 얼마나 됐는데요?”
내가 캐물었다.
“글쎄. 그 손님이 떠나자마자 너희들이 왔으니까. 따지면 십 분도 채 안된 셈이지. 아 맞다! 이거 가져가. 꼭 전해 달라고 거듭 당부하셨다고.”
정비사가 내민 것은 고글이 달린 바이크용 헬멧 두 개였다. 블랙 앤 화이트. 당연히 썬은 블랙 나는 화이트다.
“형. 다니엘 씨한테 전화해봐. 그리고 어떻게든 붙잡아놔!”
썬이 B팩토리 앞에서 명령조로 말했다. 건방진 건 사실이나 녀석이 워낙 하이텐션인 데다 시간도 촉박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내가 물었다.
“벌써 출발했으면?”
“그럼 다시 돌아오라고 해!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면 말이야.”
녀석은 그렇게 떵떵거리며 스쿠터의 시동을 켰다.
“선물 줬다고 바로 넘어가버리다니.”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남 이사! 아무튼 엄마 데리고 올 테니까 어떻게 되는지 연락 줘!”
썬이 탄 스쿠터는 점차 멀어져 간다. 물론 전보다 빠르지는 않다. 그래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썬이 다시 도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녀석의 지시대로 다니엘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림 군? 하고 묻는 목소리에 내가 입을 열었다.
“저희 방금 B팩토리에 들렀어요. 동생이 무척 좋아하던 걸요.”
“아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본론을 꺼내기 전에 목청부터 가다듬었다.
“저기… 정비사 아저씨 말로는 방금까지 여기에 계셨다고 하던데요.”
“아아… 실은 그래요. 부담 주기 싫어서 일부러 말 안 했습니다. 지금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중이에요.”
그 대답에 망연자실했지만 하는데 까지는 해보기로 했다.
“지금 저희 엄마가 오고 계세요. 괜찮으시다면 작별인사라도 나누고 가시겠어요?”
그러나 스피커 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통화가 끊어졌나 싶어 액정화면을 살피기까지 했다.
“아까 보건소 앞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되겠습니까?”
다니엘 씨가 말했다.
“네! 거기로 오시면 돼요.”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 폴더를 닫자마자 이번에는 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형. 어떻게 됐어?”
다짜고짜 묻는 녀석에게 나도 지시했다.
“보건소로 가! 그 앞으로 온대.”
“오케이!”
나는 보건소 건너편 훼미리마트 안에서 썬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 저기에 다니엘 씨 맞지?”
엄마를 무사히 픽업한 녀석이 부랴부랴 실내로 뛰어 들어온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드디어 만나는 군.”
우리는 편의점 전창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다운 버튼 셔츠 차림의 신사와 엄마의 작별인사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 사이로 비치는 포도 알 같은 햇살이 두 사람을 향해 보석처럼 쏟아져 내린다.
둘은 딱히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입가에 미소만 띠고서 서로를 아주 잠깐씩 마주할 뿐이었다. 썬이 싱겁다는 듯 말을 꺼낸다.
“뭐야. 별 거 없네?”
“대체 뭘 상상한 거냐.”
나는 다시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가 다니엘 씨에게 손을 내민다. 다니엘 씨도 그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하기 시작했다. 아스라이 사라져 버릴 꽃잎 같은 장면이었다.
다니엘 씨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썬과 나는 그 신사가 떠난 곳으로 걸어갔다. 엄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딱히 우리를 기다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저 머무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첫사랑이 왜 그토록 강렬한지, 쉽게 잊을 수 없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일각에서는 초두효과(먼저 제시된 정보가 추후 알게 된 정보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으로 ‘첫인상 효과’라고도 한다 – 옮긴이)니 자이가르닉 현상(마치지 못하거나 혹은 못한 일을 쉽게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현상으로 ‘미완성 효과’라고도 한다 – 옮긴이)이니 하는 것들로 설명한다지만 어쩌면 첫사랑은 피터팬처럼 늘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절대적이며 실제적이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인 셈이다.
“엄마는 먼저 집에 들어갈게. 유선아, 스쿠터 조심해서 타고. 아버지한테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알지?”
네버랜드에서 막 귀환한 엄마가 우리를 발견하고 말했다. 썬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물론이지. 걱정 마.”
내가 옆에서 물었다.
“근데 엄마 괜찮아?”
엄마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뭐가?”
영락없는 평소의 엄마라서 어깨를 으쓱해버렸다. 엄마는, 싱겁기는, 하고는 쿨하게 등을 돌린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 여자의 반짝이는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기분이다! 형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가 줄게!”
블랙 헬멧을 착용한 썬이 스쿠터의 시동부터 켠다. 나는 철제 프레임으로 분리된 텐덤 시트에 올라탔다.
“오목교나 갈까? 서점 가고 싶은데.”
녀석이 고글을 내리고 알랑거렸다.
“그래! 형은 역시 책을 읽어야지.”
그러면서 스로틀을 최대로 잡아당긴다. 부릉부릉, 스쿠터는 느긋하게 앞으로 튕겨나간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유유히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무리 진 뜨거운 태양 옆에 투명한 하현달이 바투 붙어있었다.
어릴 적 엄마는 저런 달에 사는 괴물이 달을 야금야금 먹다 토해내기 때문에 달의 모양이 변하는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러 나는 열일곱이 되었고 더 이상은 그런 동화를 믿지 않는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빛을 반사하여 빛날 뿐이다. 따라서 태양빛이 비치는 부분에 따라 계속 모양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시간과 계절이 지남에 따라 저 달의 모양도 변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원래 달은 언제나 둥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