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0일, 우리는 서울 양천구로 다시 돌아왔다.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주거 공간이 아닌, 상가 건물로 이사했지만. 마사지 에스테틱이었던 곳으로 이사했고, 위층에는 목욕탕, 건물 밖에는 전통시장이 있어 많은 사람이 오가는 소리를 들으며 생활했다. 화장실이 밖에 있다는 것만 빼면 넓은 방과 거실이 있어서 살기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대학 입시 준비도 그럭저럭 잘 되어갔다.
8월에는 언니가 오랫동안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해 독립했다. 어머니는 베이비시터 자격증을 준비하고자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서점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2012년 겨울 무렵, 나는 대학교 합격 소식을 접했다. 그 후에는 학교를 나가지 않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려고 애썼다.
12월, 부모님의 형편이 조금은 나아졌는지 상가에서 살던 생활을 정리하고, 반지하 방으로 이사했다. 그 무렵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베이비시터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순댓국에 들어가는 머리 고기를 유통하는 업체의 트럭 운전사로 순댓국집에 고기를 배달하기 시작했다. 두 분 모두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왔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서울시 시민 리포터 사이트나 수필 공모전에 원고를 내는 등 글을 써 소소한 원고료를 받았다. 나름의 용돈 벌이인 셈이었다. 대학교 입학 전까지 남들이 ‘일상’이라고 말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다행이었다.
2013년 3월, 학자금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겨우 마련했다. 이후 학보사에 들어가 수습기자로 활동하며 원고료를 받았다. 꿈꾸던 ‘글을 쓰는 삶’을 해내게 된 것 같아 기뻤다.
5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2번의 응급수술을 받으셨다. ‘오른쪽 반신마비가 왔다. 의식도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중환자실에 머무르게 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곁에 24시간 내내 있어야 했다. 언제 정신을 차리실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혹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 있어서. 나와 동생은 당분간 결혼한 언니의 신혼집에서 지내게 됐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말은 우리 가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인 걸까,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부재가 무색하리만치 생각보다 나는 잘 지냈다. 매주 있는 학보사 일정을 소화해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학점은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갔지만, 학교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꽤 뜻깊은 일이었다. 열중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아버지의 빈자리는 쉽게 잊을 수 있었다. 잊어야만 했다. 중환자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아버지가 언젠가는 영영 사라져도 의연하게 털고 이겨낼 수 있도록. 신문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1학년 1학기를 지냈다. 방학 때도 학보사 일정에 집중했다. 동시에 단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성인이 되었으니 더는 가족 구성원에게 짐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힘에 부치고 부담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주말이면 일식집에서 서빙을 했다.
2013년 2학기가 되기 전, 아버지가 눈을 떴다.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구나. 안도했다. 의식을 회복한 아버지는 집과 가까운 요양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머니와 나, 동생은 다시 반지하 집으로 모였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산재 판정을 받기 위해 여러 번의 판정을 거치고, 곁에서 지켜보는 게 더 힘겨울 정도의 고된 재활 치료를 받고서야 2014년 겨울, 아주 조금씩 걸음을 뗄 수는 있을 정도로 회복되셨다. 그리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우리 가족은 다시 한 집에 모였다.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따로 산 적이 없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기나긴 여정이었다.
동인서관은 사라졌으나 사실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파산 신청을 하기 전, 남아있던 직원이 동인‘서점’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근처에 있는 상가 중 하나를 사서 계속 서점을 운영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서점을 들른 적이 있는 손님들도 공간만 이전했을 뿐, 주인이 바뀌었을 뿐, 서점은 계속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나는 어린 시절처럼 ‘동인서관 사장 딸내미로’ 불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과 동인서관을 기억하는 이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러니 우리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 ‘동인서관 패밀리’로서의 추억을 간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