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스타터 레터 #4
한여름을 지나고 있던 어느 날, B가 내게 말했다. 평일 중 강남에 갈 생각이라고. 당시 다니던 회사가 그 근처에 있던 터였다. 나는 은근한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저녁에 나 보러?”
“아뇨. 새로 오픈하는 암장이 있는데 일본 세터가 문제를 냈다네.”
그렇게 단칼에 아니라고 하다니. 김칫국 한 사발 거하게 마셔 머쓱했지만, 그 말을 하는 B의 표정이 잔뜩 신나 보여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열 번은 더 넘게 갔다는 ‘그’ 암장 세터분들이요?”
B에게 가장 많이 간 여행지를 꼽으라고 하면 일본, 그중에서도 도쿄를 말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기 전에는 쉬는 날이 생기면 곧장 나리타행 표를 끊어 갔을 정도라고. 시부야 거리, 도쿄 타워 등의 명소를 좋아한 줄 알았으나,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클라이밍뿐이었다. 다양하고 재밌는 문제가 많아 클라이머 사이에서 유명한 암장을 가기 위해. 클라이머이면서 동시에 세터인 B에게 그곳은 창작의 영감을 무궁무진하게 주는 곳이었다. 2020년 이후 가지 못해 다른 암장을 찾아다니면서도 그는 그곳에 가고 싶다고 부르짖곤 했다.
이야기를 꺼낸 그 주에 정말로 B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고, 강남의 암장만 두어 번 다녀갔다. 즐거웠냐고 묻는 내게 “잠깐만, 이제 이렇게 세터들이 왔다 갔다 해주면 굳이 일본까지 안 가도 되잖아?”라고 혼잣말로 대답을 돌려줬다. 한껏 개운한 표정으로, 반나절은 물을 못 마시다가 마침내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들이켠 사람처럼.
맥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마신 것 같은 표정을 짓게 한 그곳이 궁금해졌다.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과 일정을 맞춰 퇴근하고 곧장 암장으로 향했다. 물론, B도 함께.
강남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쭉 직진하니 사거리가 나왔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건너편에서 ‘클라이밍’이라고 크게 적힌 네온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그보다 작은, 하지만 인상 깊은 간판이 보였다. ‘손상원클라이밍짐’. 그 말을 아시는지? 예로부터 이름 걸고 하는 집은 정통 맛집이라고. 뒤이어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막 1년이 된 나에게는 쉽지 않겠다는 직감도 들었다.
기대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가진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용동의서를 작성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보이는 것은. 그렇다. ‘손’이었다. 손상원클라이밍짐의 마스코트는 사장님의 성을 딴 손이구나. 어쩐지 유쾌해졌고 낯선 곳에 가면 긴장하는 몸이 조금은 풀어졌다.
스트레칭을 가볍게 한 후 어슬렁거리며 어떤 문제를 풀까, 둘러보는데 천사 날개가 그려진 홀드를 발견했다. 그것도 두 문제나. 사장님은 천사인가!
손상원클라이밍짐의 난이도는 총 8개로 나뉘었다. 흰색-노란색-초록색-파란색-빨간색-검은색-회색-갈색까지. 이날 나는 2시간 동안 파란색 난이도의 문제까지 풀 수 있었다. 직접 붙어본 결과, 맥주를 마신 것 같은 기분까진 아니었다. 나는 그처럼 어려운 문제를 풀거나 유명한 세터가 냈다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사실 그 문제가 그 문제처럼 느껴졌다. 도쿄의 암장을 숱하게 경험한 B는 문제 몇 개를 풀고 멀리서 살펴보더니 어떤 문제들이 일본 세터가 낸 것 같다며 손가락으로 알록달록한 홀드들을 가리켰다.
“손으로 잡아야 하는 홀드처럼 보이는데, 실은 잡으면 안 되는 홀드거든요. 잡으면 미끄러지거나, 길이 엇갈린다던가. 그래서 떨어져요. 이런 식으로 착각하는 홀드를 놓고. 그런 특징이 있어.”
그 말을 듣고 홀드의 위치까지 인지했으나, 막상 올라가니 시야가 좁아져 결국 ‘페이크 홀드’를 잡았고, 떨어졌다. 뒤에서 ‘그거 페이크라니까!’ 외치는 B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게 바로 일본의 맛인가. 매콤하네.
멋지고 재밌는 무브를 나도 해내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간 손짐은 내게 매운맛을 가득 보여줬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암장 벽이 까끌까끌해 문제를 풀던 중에 손등을 살짝 스쳤을 뿐인데 상처까지 생겨버렸다. 그래서 갈증이 해소되는 듯한 느낌까진 아니었던 것. 다만 종일 일에 시달려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그 순간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명상의 시간은 되어주었다.
어려운 문제가 많았지만, 지금 내 실력에 적합한 문제 또한 많았다. 그런 문제들은 멀리서 바라봤을 때 홀드를 어떻게 잡고 올라가야 하는지 길이 잘 보였다. 머릿속으로 예습한 뒤 벽에 붙으면 홀드와 나 사이에 자석이라도 있는 듯이 손을 뻗으면 착, 잡히고, 발을 딛으면 척, 달라붙었다. 루트 파인딩을 잘 해냈다는 성취감과 완등했다는 희열감을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업무에 시달린 일들이 머릿속에서 싹 지워졌다.
2시간 바짝 운동한 후 깨달았다. 나는 조만간 이곳을 다시 찾으리라고. 다른 암장을 많이 다녀보진 않았지만, 초보자부터 고인물(?) 클라이머까지 한곳에 모이는 암장은 잘 보지 못했다. 난이도에 맞게 문제를 잘 조절하는 암장을 아직까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문제를 풀면서 ‘이게 왜 초록색 난이도지?’, ‘이게 왜 하늘색 난이도지?’, ‘사장님, 리치 탓으로 변명하게 만드는 문제를 내시면 어떡해요’를 중얼거리게 하는 암장을 가면 갔지.
손상원클라이밍짐은 오히려 ‘아, 이래서 하늘색 난이도구나’, ‘아, 이게 바로 내 실력에 맞는 문제구나’라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발 기술을 응용해 홀드를 디뎌야 할 것 같은데, 싶으면 그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저 홀드는 힘으로 끌어당겨야겠다, 싶으면 역시나 그랬다. 그만큼 나의 ‘무브’로 올라가는 문제들이 많았다-몸이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역시, 이름 걸고 하는 맛집 맞네.
기왕이면 멋진 동작으로 홀드를 잡는 나의 모습을 찍고 싶었지만, 실패 영상만 다수 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날의 운동이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다. 함께한 친구들을 응원한 것, 길을 함께 고민한 것, 내가 못 푼 문제를 깔끔하고 멋진 동작으로 완등한 클라이머를 목격한 일들이 아주 즐거웠기 때문이다. B가 문제를 바라볼 때 나타나는 특유의 몰입한 표정과 즐거운 듯한 얼굴 또한 간만에 보았다. 그가 날랜 몸짓으로 홀드를 잡을 때마다 감탄하기 바빴다.
이런 기억들을 쌓았는데, 아쉬움이 남을 리가. 또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만 더욱 진해졌다. 그때가 되면 나도 남들에게 나름 꿀잼 무브를 보여줄 정도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언감생심의 마음을 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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