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과 처음 만난 날, 인연이 찾아왔다 7
좋은 친구 사이로, 강습생과 선생님의 거리를 유지하자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리만치 그와 다시 마주 앉게 됐다. 함께 운동한 날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강습생과 좋은 친구 그 어디쯤이라는 걸 깨달은 날. 그 이후로는 선생님의 SNS에 일상을 공유하는 게시물이 올라와도 먼저 메시지를 보내거나 댓글을 달지 않았다. 초보자가 기진맥진할 정도로 클라이밍을 열심히 알려준 것도, 비타민 선물에 감동한 내게 "곧잘 하는 선물"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일종의 선을 긋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책을 추천받은 것이 고마워서였어요. 딱 여기까지가 좋아요'라고 에둘러 말한 느낌. 다정한 사람이지만, 단호한 사람이기도 하구나.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처신해야겠다는 생각에 할 말만 써서 답장했고, 인사치레로라도 안부를 묻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횟수를 줄이려고 했다. 책을 추천해 달라는 내용엔 말수를 줄이는 데 실패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 게시물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맛집과 카페를 공유해 줬고, 내가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의 출처를 물었다. 하지만 지난주의 기억이 무척 강렬했던지라 이전처럼 더는 착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겠거니 생각했다. 으레 보이는 다정함이리라고. 책을 추천해 주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고 답장을 느릿느릿 보냈다.
그랬는데, 어쩌다 또 약속을 잡게 된 건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언니와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다. 그 행복한 순간을 기록하려고 게시물을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맛집을 알려달라며 선생님에게 메시지가 왔다. 나는 연남동의 어느 곳이 가지튀김으로 유명하고 직접 가봤다고 하며 사진을 보냈다. 그러자,
"저게 가지튀김이에요? 제가 아는 비주얼과 다른데요...? 다음에 같이 가주세요!"
"선생님이랑 입맛이 찰떡콩떡. 신기해요! 생각나면 말해주십쇼." (제가 왜요...? 라는 뜻이었는데!)
"일요일엔 뭐 하세요? 가지튀김 먹으러 가요!"
바로 약속을 잡던 선생님. 생각나면 말해달라고 했는데요... 진짜 먹고 싶으셨나 봐, 라고 그렇게 넘어갔다. 그날 약속이 있었지만, 저녁 이전에는 끝나는 일정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지튀김을 먹기로 약속한 날, 일정이 끝나자마자 곧장 연남동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만나기로 한 장소를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선생님을 기다리게 한 것 같아 걱정됐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던 중 숨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 나를 깨닫자 우뚝, 발걸음이 멈춰졌다. 아주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숨을 고르면서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웃겼다.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나는 또 설레고 있었던 것. 티 내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식당으로 길을 안내하려는데 그가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말했다. 근처에 소품샵이 있다고, 전시도 하는 것 같다고. 나 배고픈데 굳이 지금? 싶었지만, 살 게 있나 보다 생각하며 선생님을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기록'과 관련한 문구류와 책, 리빙 제품을 파는 공간이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던 전시 또한 기록과 연관이 있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아이와 식물을 기르는 경험을 주고받은 편지들이 매장 한편에 꾸며져 있었다. 자라나는 것들을 소중히 지켜보는 마음,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나누는 문장을 보면서 그를 흘끔 쳐다봤다. 선생님은 이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여기고 있을까. 그는 지금 여기를 어떻게 기록할까.
전시를 다 둘러보고 원래의 목표였던 가지튀김을 향해 식당으로 갔다. 칭따오와 가지튀김을 아주 맛있게 먹었고, 알찬 하루를 보내 기분까지 좋았다. 반씩 나눠 내자고 말하려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전부 계산한 선생님. 그러면서 다음엔 나보고 사달라고 했다. 얻어먹으면 마음이 영 불편한데요...
어, 잠깐만. 이거 혹시? 또 만나자는 여지를 주는 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다음 주 일요일. 가지튀김 얻어먹은 것 갚게 해달라고 징징거려서 또 약속을 잡았다. SNS 메시지로 대화하는 것도 다소 불편하다는 핑계로 선생님의 전화번호까지 얻어냈다. SNS 앱이 아닌, 메신저 앱에서 알림이 매일 오기 시작했다. 더 빠르게, 더 많은 그의 일상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일일 강습에서 처음 알게 되고, 단둘이 운동하고 가지튀김을 먹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두 달.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빠르게 좋아할 일이 살면서 또 생길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그만큼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구나. 마냥 천성이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이끌어가는 조언이라면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 타인의 말을 듣고 또 분석하는 태도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뼈저리게 상처받은 경험, 자신 또한 깊은 상처를 준 적이 있어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데서 갖는 태도. 보통의 노력이 아닌, 계속 기억하고 심혈을 기울여야 나오는 마음. 그래서 그동안 선생님과 나눈 대화들이 즐거웠던 거겠지.
그의 곁에 있게 된다면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기대하며 만난 저녁 약속. 지난주의 코스와는 약간 다르게 1차로 멕시코 요리를 먹고, 2차로 맥주를 마셨다.
나름 맛집 데이터가 풍부하다고 자부하던 나였는데, 이날은 그 자부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내가 맛본 멕시코 요리는 뭐였지? 맥주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감탄하기 바빴다. 수제 맥주의 세계에 눈을 뜬 날. 선생님과 별의별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와의 거리가 더 좁혀진 듯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서야 식당에서 나왔다. 언제 주위가 어두워졌는지도 모를 만큼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다. 아쉬움을 애써 숨기며 오늘 재밌었다고,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했다. 집으로 향하려는데 집 근처 역까지 데려다준다는 그. 혹시 나와 같은 마음인 걸까, 언제 그의 생각을 들려줄까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고 말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다가 무심코 선생님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들뜬 마음의 나와는 다르게 평소 그의 모습인 듯한 표정에 덜컥 겁이 났다. 만에 하나, 또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한 거라면? 이전의 사람처럼 누구에게나 여지를 주며 잇속을 챙기는 사람이라면?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내가 잊어버려서, 나에게만 특별 대우를 하는 거라고 착각한 거라면? 아니다.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선생님도 나를 천천히 알아가고 싶은 걸지도.
삽시간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에 만난 사람과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명확히 알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척 빨리 친해진 편이었다. 개개인이 '우리'라는 단어로 묶이려면 그만큼의 시간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겁에 질리니 달아나고 싶어졌다. 대화를 나누고 만남을 지속하려고 하지만, 막상 솔직한 마음을 내비치진 않잖아. 선생님의 생각을 가늠하는 시간을 더 보내기엔 나는 지친 상태였다. 더 지켜보고 알아가면 될 일이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상상도 못 할 만큼, 감당하기 벅찰 만큼 누군가의 이면을 본 적이 있으므로.
이래서는 또 나만 상처받고 끝날지도 모른다. 조급하고 섣불리 내린 판단일지라도 차라리 내 착각을 내보이자고 생각했다. 역에 도착하고 집으로 곧장 향하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제게 좋은 선생님으로 남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고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도망치듯이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도착하니 선생님에게 잘 들어갔냐는 연락이 와 있었다. 잘 들어왔다고, 역까지 바래다줘서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다. 이후로는 상투적인 말이 오가기를 바랐다. 좋은 밤 되시라, 그동안 헷갈리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자신은 그런 뜻으로 대한 게 아니었다며 좋은 사이로 남으면 좋겠다. 그런 내용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내일 까눌레를 먹으러 가자'라며 유명한 곳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 선물로 받은 까눌레를 집 도착하자마자 먹었다고, 또 먹고 싶다고. 거절했다.
"지구가 종말하더라도 하나의 까눌레 같이 드시지 않겠습니까?"
끈질기게 물어보던 선생님. 그러면서 다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 와중에 다섯 번째의 책을 묻다니. 오늘 맥주 마시면서 얘기했다고 답장을 보냈다. 취향일 것 같으면 그 책 보시라고. 그는 알겠다고 하더니 '내일 1시 어때요?'라고 말했다. 선물한 까눌레가 유명 베이커리에서 산 거라 그 맛있음을 알긴 해도 굳이 다른 곳까지 가볼 일인가 싶었다. 역시 할 말이 있는 거겠지? 바로 다음날 보기엔 좀 창피한데.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카페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월요일이었지만, 대체 휴무일이어서 둘 다 쉬는 날이었다. 나도 선생님도 어쩌다가 이틀 연속 만나고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주 앉았다.
주문한 까눌레와 커피가 나왔다. 무슨 얘길 하려고 휴일에 사람을 불러냈나 생각했다. 선생님은 까눌레를 반씩 쪼개더니 드세요, 라고 말할 뿐 정말 묵묵히 까눌레만 먹기 시작했다. 사람을 불러놓고 열심히 음미하던 선생님. 나는 긴장하며 나온 게 오히려 머쓱해져서 '여기 말차맛 맛있네요' 이딴 소리를 늘어놓았다.
까눌레도 커피도 채 30분도 안 되어 다 '해치운' 것 같다. 혼자서 조용히 책 읽는 사람은 제외하고 다들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선생님과 나만 아무 말 없이 멀뚱히 앉아있었다. 나 여기 왜 있는 거야? 싶을 무렵, 그가 갑자기 근처에 푸딩 맛집이 있다며 그곳에 가자고 했다. 다 먹고 나서 하는 말이 푸딩? 오늘 디저트 미식회 하러 나온 건가? 예에... 맘대로 하십쇼. 자포자기 상태로 또 그를 따라나섰다.
기대보다 푸딩은 맛있었다. 언짢은 기분이 가실 정도로. 하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또 괜히 내부에 크게 난 통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날이 좋네요,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여기 손님들 보니 여성분들끼리 오거나, 커플들이네요'라는, 내 기준엔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나 정말 오늘 왜 나온 거야...
침묵 속에 앉아있는데 그가 '갈까요?'라고 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왜 부른 거지? 생각하며 거리로 나왔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걷는데 선생님이 말을 꺼냈다. 주저하다가 얘기를 꺼낸 건지 목소리가 아주 살짝 잠겨있는 듯했다.
"사실은 다섯 권을 추천받고, 다 읽는 날 데이트를 신청하자고 다짐했어요.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그렇게 친해지고 싶었고... 그 정도 읽으면 데이트하자고 얘기할 만큼 가까워져 있을 것 같아서. 근데 아직 다 못 읽었어요..."
그 말에 엉켜있던 머릿속의 실타래가 살짝 풀리는 듯했다. 나는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시느 YES24 - 오늘의 책' 코너라도 된 것처럼 집요하게 물어본 것이군? 뒤이어, 또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강습받은 건 8월 말, 내가 처음 선생님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9월의 두 번째 날이었다. 이주 만에 그런 다짐을? 언제부터 내게 마음이 생긴 걸까.
"언제부터 제가 좋았어요?"
"글이요. 처음 시느님을 알게 한 글."
그날 밤에 나의 감정을 쏟아낸 글, 그가 댓글을 달아준 그 글을 말하는 거였다. 강습 때는 그냥 별 말없이 지나가지 않았나? 글만으로 사람이 좋아질 수가 있나? 실타래가 다시 엉켰다. 엉키다 못해 멍해졌다. 아무래도 좀 별나고 좋은 사람한테 걸려든 것 같다.
"책 다 읽고 그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하겠습니다."
이틀 뒤, 선생님에게 책을 다 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직접 만나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다고 해 알겠다고 했다. 퇴근 시간이 밤 10시라는 걸 알고 조금은 당황했지만. 그 정도로 빨리 얘기하고 싶단 뜻이겠지, 재밌게 읽었다고 말하자마자 다섯 번째 책으로 정했다는 것도, 두 달 만에 다섯 권의 책을 모두 읽었다는 것도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이 나를 바래다주곤 했던, 집 근처의 역에서 한강공원까지 걸었다. 한강공원에서 집까지 또 함께 걸었다. 그날 한 시간은 넘게 걸은 것 같다. 밖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했던 시기. 그래서 편한 옷과 신발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산책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선생님의 솔직한 마음을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더 눈치가 없었구나 반성도 하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속으로 반박도 해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깨달아갔다.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선생님의 방식이 어렵게 다가오긴 해도, 잘 알기 어렵겠지만서도 나는 결국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소중히 다루는 마음으로 느껴져서.
"저, 그러면 주말에 정식으로 만나는 거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뭔데요?"
"잠시 손 좀 주시겠습니까?"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또 뭘 하시려고? 의아해하며 나도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그의 손이 올려졌다. 그러고는 솜씨 좋게 방향을 돌리더니 손깍지를 껴 맞잡아왔다.
"손잡고 싶다는 말을 만날 때부터 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진짜 별나고 좋은 사람이야.
새로 접한 운동을 통해 '삶'이라는 녀석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벽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클라이밍처럼, 멀리서 바라보면 막막하게 느껴지는 문제도 막상 붙으면 눈앞의 홀드에만 집중하게 되듯이. 하나하나 붙잡고 딛으며 끝내 완등하는 것처럼. 누군가와 깊은 신뢰를 쌓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던 때, 선생님이 나타났듯이. 겁을 집어먹었으면서도 그가 손을 달라고 할 때 손쉽게 내어주었듯이.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그런 걸지도.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없다는 걸 알지만서도 지금은 그저 내게 내밀어준 이 손을 꼭 붙잡고 싶다. 우리가 서로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있기를 바랐다. 강바람에 얼었던 손이 그의 체온으로 조금씩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