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과 처음 만난 날, 인연이 찾아왔다 6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야 오래가는 법이야."
엄마는 내게 어릴 적부터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대화가 즐거운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잘 맞는 성향이면서도,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친구든 연인이든 그런 사람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나 또한 타인에게 즐거운 사람이 되어주라고 했다.
아무래도 오래 알고 싶은 사람을 또 찾은 것 같아, 엄마.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녀의 말이 새삼 떠오르곤 했다. 그만큼 무척 즐거웠다. 한 번으로 그치리라고 생각한 '책 추천하는 일'도 어느덧 두 권, 세 권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일상을 조금씩 들려주었다. SF 분야에 관심이 많다, 휴일엔 책을 읽거나 센터에서 운동한다, mbti는 entp인데 자신과 비슷한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다, 보라색을 좋아한다 등등. 그러면서 선생님을 조금씩 알아가게 됐다.
독서 감상을 주고받을 때면 특히나 들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상대도 좋아하고 여기에 비슷한 맥락의 감상이 오고 간다면? 생각의 결이 같은 사람과의 대화는 퍽 행복한 일임을 깨달았다. 또 다른 책을 읽고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인상 깊게 본 부분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생각으로 책을 권하고, 그에게서 추천받은 책을 읽어나갔다.
한편으로는 요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평일엔 일하고, 휴일엔 책 읽거나 운동하기 바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붙잡고 매일 대화를 나눠도 괜찮을지, 선생님의 휴식을 내가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눈 메시지를 살펴봤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생겨 신난 나머지 나 혼자 우다다 얘기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큰일났다. 이런 메시지에도 성심성의껏 답장을 해주시다니. 클라이밍 센터 영업이라고 해도 선생님, 정말 좋은 분이다. 나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보답하지?
궁리 끝에 친구 한 명을 꼬드겨 다시 암장에 가기로 했다. 이토록 다정하고 친절한 영업 방식이라면 기꺼이 클라이밍에 빠져주자, 하는 생각이었다. 예약 페이지를 통해 강습을 신청했고 그 내용을 SNS에도 올렸다.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즐거운 대화를 나눈 데 대한 보답이라고 알리고 싶었다.
"다른 친구 분과 오시는 거죠? 저도 낮에 운동하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내 생각보다 더 다정한 사람이었다. 일부러 휴일을 골라 일일체험을 신청했는데, 센터에 들를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설마 쉬는 날에 일터에 오겠어? 생각하며 친구와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두어 동작을 더 알려주고 자리를 떠났다.
영업인지, 사람 좋은 특유의 성격인 건지. 선생님의 친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 동네 카페에서 책을 읽던 중 핸드폰에서 우웅-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었다.
"책갈피 하나 드릴까요? 얼마 전에 샀는데 한 세트에 5개 들어있어서 쓰고도 남아서요!"
마침 근처 카페에서 자신도 책을 읽고 있었다며,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는 선생님이었다. 이쯤 되면 슬슬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당시 책갈피를 모았던지라 물욕의 마음이 부담감을 이겼다. 감사히 받겠다고 하자마자 지금 가겠다는 답장이 왔다.
정말로 가까이에 있었는지 얼마 안 있어서 그가 나타났다. 센터 밖에서 만난 건 처음이었다. 책갈피만 주고 금방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생님은 내게 '앉아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어색해서 안 되겠는데요, 라고 거절하기도 머쓱해 그러시라고 했다.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에게 받은 인상은 똑똑히 기억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딘가 섬세하다는 것, 웃을 때면 눈이 엎어놓은 초승달처럼 한없이 휘어진다는 것, 반대로 자신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얘기한다 싶으면 진중한 눈빛을 띤다는 것. 가만히 마주 앉아 조곤조곤 말하는 선생님은 내게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운동할 때가 아닌 일상의 모습은 이렇구나, 휴일을 보내는 그는 주로 이런 모습이겠구나, 상상해보게 됐다.
카페에서 만난 날 이후로도 이전과 같이 책, 클라이밍을 주제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말이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사람에게 상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진심을 다해 타인을 대해도 될까? 아니, 그 이전에 나 혼자 착각하는 건 아닐까? 빠른 속도로 누군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 이 마음이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선생님과의 대화는 늘 즐거웠기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꽁꽁 감췄다. 혹시라도 마음을 내보여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 책 친구'로 나를 인식하길 바라며 세 번째 책을 추천했을 때는 어느덧 추석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휴 때 클라이밍 한 번 하실래요? 책 추천받은 게 많은데 보은 해야죠!"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마음을 더욱 흔들어놓는 메시지를 받았다. 암장 영업을 이 정도로 열심히 하진 않을 텐데, 혼자만의 감정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하다못해 자주 가는 칵테일 바의 사장님에게도 그간의 일화를 털어놓았다. 다들 호감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사람과 빨리 친해지는 천성인 건지 긴가민가하긴 하다며, 일단 단둘이 만날 때의 모습을 지켜보라고 했다.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암장으로 향했다.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그가 마중 나와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운동하기로 미리 정했었다. 그걸 알면서도 마치 데이트하는 느낌이라 설레고 긴장됐다. 카페로 가는 동안 '왜 정류장까지 나와있지? 아냐, 예비 회원한테 베푸는 친절이야, 착각하지 말자'를 몇 번이나 속으로 외쳤는지.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마시는데 선생님이 불쑥 드럭스토어 로고가 박힌 종이봉투를 건넸다. 열어보니 비타민이 들어있었다. 그간 지켜보니 활동량에 비해 먹는 게 부실해 보인다며, 챙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친구들아, 사장님, 이거 그린라이트죠?
이 생각은 클라이밍을 시작함과 동시에 사라졌다. 선생님은 정규 강습을 들은 적도 없는 초보자에게 약 2시간 동안 볼더링 벽에 붙게 하고 마무리로 지구력까지 단련시켰다. 그야말로 운동 강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운동 후 팔다리가 탈탈 털린 채로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근처의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이었다. 그렇다, 선생님이 내게 먹인 것은 햄버거였다. 탄단지가 완벽하다는 그 햄버거. 우리는 각자 햄버거 세트를 계산해 먹었고(일말의 양심으로 제로콜라를 마시는 내게 '탄수화물과 먹으면 오히려 더 지방으로 전환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식의 말도 했다!), 그렇게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돌이켜봤다. 함께 커피도 마시고 선물도 받았다. 운동을 같이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데이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날 그에게서 받은 느낌은 '운동 강습' 그 자체였다.
여기에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다음 날 비타민 선물은 처음이라고, 고맙다고 보낸 메시지에 '곧잘 하는 선물'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잠깐 잊고 있었다. 그의 본업은 약사라는 것을. 다른 것도 아닌 비타민 선물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게다가 트레이너라면 늘 하는 짓이 아닌가. 병 주고 약 주고. 책 추천해준 데에 보은 하겠다더니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한 그였다.
얼추 결론을 내렸다. 이제 착각은 그만하자. 회원 유치를 위한 암장 영업도 맞고 원래 다정한 사람도 맞는 것 같다.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좋은 친구, 딱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