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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느 Dec 05. 2022

클라이밍과 처음 만난 날, 인연이 찾아왔다 5

강사 - 강습생 사이에서 '친구'로

퇴근하고 운동을 하던 중 인스타그램 DM이 왔다는 알림을 보고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선생님이었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전시와 관련한 대화를 나눈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이후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나 사진을 올리지 않아 대화를 주고받을 화제는 딱히 없을 텐데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메시지함을 열었다.


내용은 다름 아닌 독서 감상평이었다. 나는 책을 추천한 날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클라이밍 강사로 일하고 또 다른 직업도 있는 사람인데 5일 만에 다 읽다니? 운동 강사의 이미지에 '독서를 정말 좋아하고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추가됐다.


"추천해주신 책 오늘 마저 다 읽었어요!"라고 시작한 선생님의 메시지. 사실 한두 마디 정도의 짤막한 감상이겠거니, 생각했다. 메시지라는 게 손바닥만 한 핸드폰 액정을 붙잡고 쓰기 때문에 시간과 고민을 크게 안 들이지 않나. 하지만 나는 결국 러닝머신 기구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선생님의 감상은 스쳐 지나가듯이 읽기엔 너무 길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아래에서 위로 올리면서 찬찬히 읽어나갔다. 내가 재밌게 본 부분을 선생님은 이렇게 읽었구나, 웃기도 했구나. 책을 읽으며 즐거워했을 그의 모습이 잠시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뒤이어 뿌듯함과 안도감이 들었다. 선생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책을 추천해달라는 문장을 봤을 때 정세랑 작가의 에세이를 바로 떠올렸으면서도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망설였다. 내 취향과 달라서 재밌게 읽지 못하면 어쩌나, 책의 감상을 즐겁게 나누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으로. 나는 소설, 시, 에세이의 장르를 좋아하는데 선생님이 주로 읽는 장르가 아니라면 큰 감흥을 주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언젠가 그의 인스타그램에서 본 책의 장르가 무엇인지 확인까지 하고서야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도 모두 에세이였다.)


걱정한 일이 무색하게도 책의 내용은 선생님의 마음에 든 듯했다. 나는 감상평을 읽으며 추천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진 한편, 어떤 기대가 생겼다. 친절하고 좋은 선생님(그리고 사장님)과 책 이야기도 종종 할 수 있는 친구가 되면 좋겠다.


길게 쓴 메시지를 몇 번 더 주고받았다. 내가 추천한 책을 읽은 선생님의 감상, 선생님이 추천한 나의 감상을 서로 나눴다. 그때마다 친구들과 가벼운 독서 모임을 하는 것 같아 그와의 대화가 점점 즐거워졌다. '클라이밍', '강사', '안전', '좋은 사람' 등의 납작하고 파편적인 텍스트로 머릿속에 자리한 선생님이 점차 한 사람의 형태로 변해갔다. 회원의 안전을 신경 쓰고 클라이밍을 알려주는 이미지가 전부였던 그가 나와 같이 독서를 좋아하고 감상을 나누는 걸 즐기는 '사람'으로.


메시지 너머의 선생님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본업과 부업을 하면서도 책을 어쩜 그렇게 빨리 읽는지, 그동안 어떤 책을 읽었고 제일 재밌게 읽은 책이 무엇인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연주회를 감상하는 것도 좋아하는지 등.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 짧은 기간에 사람 그 자체를 궁금해하고 호감을 느끼는 일이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데 혹시나 이성적인 호감으로 받아들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까지 했으나, 우리가 가까워지는 두 달 동안 선생님은 정말로 착실하게 책 추천리스트만 받아갔다.




마음이 생겨나게 한 선생님의 감상을, 일부 공개해봅니다. :)


"추천해주신 책 오늘 마저 다 읽었어요! 쉬는 날인데, 비가 와서 한가로이 읽었네요! 첫 뉴욕 여행 편은 고민이나 망설임, 불안감 같은 게 크게 느껴져 어렸을 적 수학여행이나,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느꼈던 부담감 같은 게 떠올라 공감 가고 집중이 됐어요. 두 번째 여행 아헨 편부터는 정세랑 작가가 10년 차 유학생처럼 편안한 느낌의 여행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재밌었습니다.

(...) 


이후로 오늘 마저 읽은 부분은 블로그에서 자주 접할 여행 후기 같은 느낌이었어요. 여행하며 느낀, 위트 있는 에피소드 비중이 훨씬 커서 읽으면서도 피식 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얼마 전 선유선가에 갔더니 같은 책이 꽂혀있어 반갑더라고요! 다음 책도 추천해 주시겠어요!?"


선생님이 책의 감상과 함께 보내준 사진 (제공 : @bum_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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