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
고등학생 때쯤이었나? 한창 첫사랑을 하던 시절이었다.
‘첫’이라는 단어는 묘한 힘이 있다. 설레고, 아름답고, 하지만 어딘가 서툰. 그때의 나도 그랬다.
나와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우리의 몸에 내려앉았고, 그게 체온을 슬쩍슬쩍 빼앗아갔다.
우린 다리를 동동 구르며,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려 애썼다. 살짝만 다가가 서로의 체온이라도 나눴으면 좋았겠지만—그땐 모든 게 서툴렀다.
얄궂게도, 내 버스는 금세 도착했다. 하지만 그녀의 버스는 20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내심 다음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것도, 그런 마음을 들키는 것도 그땐 왠지 부끄러웠다.
결국, 괜히 어색하게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인사하곤 버스에 올랐다. 창문에 뽀얗게 서린 김을 손으로 슥 닦고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도 웃었다.
버스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내 마지막 시야 속 그녀는, 얼어붙은 손을 입김으로 후후 불며 녹이고 있었다.
날씨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추운 건지, 왜 교복은 치마인 건지,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바람은 그렇게 거센 건지… 괜히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모든 것에 '왜?'라는 물음을 걸어두곤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거리에서 파는 보온통 속 뜨거운 캔커피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 캔커피 하나를 그녀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버스에서 내렸다.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를 허겁지겁 꺼내 따듯한 캔커피를 샀고, 전 정류장을 향해 다시 달렸다.
어쩌면, 그건 그녀를 위한 행동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 그건, 진눈깨비를 맞으며 수백 미터를 달려가는 일조차 웃음 짓게 만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정류장에 도착한 내 모습을 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져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숨을 고르곤 캔커피 두 개를 내밀며 말했다.
"추워 보여서..."
캔커피 위로 눈이 몇 방울 떨어져 금세 물로 변했다. 그게 캔커피를 조금이라도 식게 만들까 봐 나는 그녀 손에 캔커피를 꼭 쥐어주었다.
"한 정거장 갔다가 뛰어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캔커피 주려고?"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았다.
"너 바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곤 그녀는 '하하하' 하며 크게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참 바보 같은 일이었다. 고작 얼마 가지도 않고 금방 식어버릴 캔커피 하나 주겠다고, 홀딱 젖으며 한 정거장을 내리 달려오다니…
근데 그런 바보 같은 일을 누군가를 위해 한다는 건ㅡ참 사랑스러운 일이다.
달콤한 기억은 잔인하다.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면, 내가 얼마나 무채색인 세상에 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마음 한편에 남겨둔 색감들은 모두 그때에 머물러 있고, 지금의 나는 잿빛의 현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머릿속엔 아직 그 기억의 잔상이 남아 있다. 알록달록한 감정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나를 붙잡았다. 그대로 빠져 있자니 하루가 통째로 잡아먹힐 것 같았다. 나는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습관처럼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모에카의 메시지가 떠있었다.
[시눈, 혹시 ‘라멘’이라는 음식 알아요? 만화에서 봤는데… 뜨거운 국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주인공이 막 허겁지겁 먹더라고요.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나는 그 장면이 어떤 건지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나도 어릴 적엔 그런 눈빛으로 만화에 나오는 라멘을 바라봤던 적이 있었으니까.
[알 것 같아요. 저도 어릴 때 만화에 나오는 라멘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곤 했거든요.]
그렇게 답장을 남겼다.
라멘이라…
요즘 나는 대부분의 끼니를 배달로 때운다. 배달드론이 등장하고 나서, 요식업의 풍경은 크게 바뀌었다.
배달드론으로 인해 배달비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자, 사람들은 밖에 나가 먹어야 하는 음식들보단 쉽게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가끔은 그런 변화들이, 내 인간관계를 더 단절시켰던 건 아닐까 싶다.
라멘 같은 경우 밖에 나가서 먹어야 하는 음식에 속하기 때문에, 그게 꽤 귀찮았던 나는 어느새 그 음식을 잊고 살게 되었다.
[근데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는 안 먹었어요. 라멘 좋아하긴 해요. 근데 그걸 먹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해서 좀 귀찮거든요. 그래도… 모에카랑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까, 괜시리 다시 먹고 싶어 지네요. 내일, 나가서 한번 먹어볼까 봐요.]
그 말은 별 뜻 없이 한말이었지만, 막상 보내고 나니 무언의 약속처럼 이상하게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다음 날, 오래된 라멘집을 찾았다. 낡은 간판과 바람에 흔들리는 천막, 안쪽에서 들려오는 면 삶는 소리. 오랜만에 외출이었다. 모처럼 바깥공기를 마셨다.
키오스크를 통해 라면 하나를 주문하곤 낡은 나무 의자를 꺼내 앉았다. 음식이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님은 나 혼자밖에 없는 듯했다. 한산한 가게에는 작게 틀어놓은 티비 소리만 조용하게 들려왔다.
곧이어 라멘이 나왔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담길까, 앵글을 바꿔가며 몇 장을 더 눌렀다. 평소엔 안 하던 짓이라. 괜히 민망해졌다.
라멘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눅진한 국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입안으로 한입 넣었다.
'그래, 이맛이었구나.'
쫄깃한 면발, 진득한 육수. 오랜만에 먹는 라멘은 기대 이상이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그릇은 비어 있었다. 말 그대로 '흡입'했다.
집에 돌아와, 모에카에게 사진과 메시지를 남겼다.
[이게 라멘이에요. 국물이 진하고, 엄청 뜨거워요. 젓가락으로 면을 들었을 때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모에카가 꼭 봤어야 했는데. 만화와 비슷했어요.]
답장은 밤늦게 되어서야 도착했다.
[와… 시눈, 진짜 다녀오셨군요. 정말 만화에서 보던 모습과 비슷해요 저기 동글동글한 어묵까지. 냄새는 어때요?]
나는 낮에 먹었던 라멘 냄새의 기억을 더듬었다. 기름진 육수 향, 살짝 탄 듯한 면 냄새, 진한 간장, 그 사이에 파 향기.
[기름진데 따뜻하고, 뭔가 노곤해지는 냄새예요.]
[음… 뜨거운 물로 목욕할 때 맡는 냄새려나..?]
나는 그 라멘냄새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모에카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나는 모에카가 궁금해하는 음식들을 하나씩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상상 속을 대신 살아주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예전엔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이었는데, 이제는 한 입 한 입, 맛을 음미하며 먹게 되었다.
비빔밥 속 당근은 의외로 은은한 단맛이 있었고, 고사리에서는 흙냄새 같은 향이 났다. 잡채에선 짭조름한 간장 맛보다 표고버섯 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졌다.
나는 음식을 ‘표현하기 위해’ 먹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냄새를 기억하고, 음식의 질감을 떠올리며— 그 모든 감각을 어떻게 말로 옮기면 좋을지 고민했다. 지구에선 너무도 익숙한 맛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들. 내겐 익숙한 맛들을 낯선 설명으로 풀어내며, 그녀가 조금이나마 그 맛을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렇게 나는 며칠 동안 비빔밥, 잡채, 크림파스타, 구운 고등어, 딸기빙수… 여러 가지 음식들의 사진을 찍고, 설명을 곁들여 전송했다.
그녀는 항상 진심으로 반응했다.
[비빔밥이 이렇게 알록달록할 줄 몰랐어요. 고사리라는 친구는 생긴 게 귀여워요.]
[구운 고등어는 어떤 냄새일까요? 타는 향이 날까요?]
[어쩌면 저기 빨간 저 딸기라는 것, 화성에서도 재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맛을 알게 되는 날에는 행복하려나..?]
직접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나보다 더 생생하게 그 감각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려 했다. 그렇게 상상하는 모에카를 위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일이, 어느 순간 나한테는 무척이나 의미 있게 느껴졌다.
나의 외롭던 일상에 누군가의 시선이 생겼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점점 내 인생의 리듬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에카와의 대화시간은 새벽 시간대가 되어 있었다.
이 또한 재미있는 현상이었는데, 화성의 하루는 지구보다 약간 길다. 정확히는 24시간 39분.
모에카가 화성 시간으로 매일 밤 10시에 연락을 보내면, 지구 시간으론 첫날은 10시, 다음날은 10시 39분, 그다음 날엔 11시 18분… 이렇게 대화 시간은 매일 39분씩 밀려갔다.
결국 몇 주쯤 지나고 나니, 나는 새벽 3시쯤에야 그녀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모에카는 하루에 10시간씩, 주 6일을 쉼 없이 일해야 했다. 화성의 개척과 생존이 달린 일이라 그녀의 하루는 늘 정해진 리듬 안에서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 시간도 그녀의 일정에 맞춰졌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사는 내가, 그녀의 일과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연락을 기다리게 되었다.
[시눈, 지구의 시간으로 지금은 새벽 3시쯤이지요…? 언제든지 졸리면 자도 좋아요. 시눈과의 대화는 너무 즐겁지만 저 때문에 무리하게 되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아요.]
근데 사실 나는 괜찮았다. 피곤하든 말든 내가 하는 일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언제든 내가 작업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이었고, 모에카와의 대화는 지금이 아니면 못하는 일이었으니까.
잠은 언제 자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만큼 모에카와의 대화는 내 인생의 어느 부분보다 흥미로웠다.
아쉬운 것도 있었다. 모에카와 하루에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세 시간 남짓이었다. 그래서 우린 하루에 6~7개 정도의 메시지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서로가 더욱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한 번에 여러 개의 메시지를 보내고 서로의 메시지 하나하나에 코멘트를 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어쩔 땐 메일처럼 길게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은 식물을 배양하는 야외돔의 시설 유지보수를 갔다 왔어요. 매일 꼼꼼히 점검을 하긴 하지만, 수확철이 다가와서 모두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분위기였답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서 방진필터만 교체하고 왔지만요! 오늘 시눈이 보내준 사진 속 음식은 먹어본 적이 있어요, ‘컵케이크’ 맞죠? 이번 제 생일에 부모님께서 지구에서 먹는 생일음식이라며 선물해 주셨어요. 그게 바로 제가 먹어본 첫 번째 ‘빵’이었어요.(웃음)]
모에카는 자신이 그때 받았던 컵케이크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얇게 발린 생크림과 퍽퍽해 보이는 빵의 모습. 하지만 그 빵 하나를 받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을 모에카의 모습을 떠올리자 귀여움과 연민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래. 모에카를 향한 내 마음은 그러했다. 항상 밝지만, 어쩐지 가여운사람.
자유가 제한된 세계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걸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 그런데도 작은 걸 소중히 여기고, 짧은 경험 하나에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런 모에카의 모습에 비춰보인 나의 삶은 조금 부끄러운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모에카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있잖아요, 저는 올해로 11살이 됐어요.]
에…? 나는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11살이면… 초등학생이잖아? 설마 지금까지 초등학생과 이런 진지한 대화를 나눠왔단 말인가?
나는 심각하게 혼란에 빠져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때 다시 메시지가 한 줄 더 왔다.
[놀랐죠? 하하! 화성의 나이로 11살이에요. 지구의 나이로 환산하면 21살 정도? 되었겠네요. 이런 짓궂은 장난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어요! (웃음)]
나는 메시지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당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가도, 이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화성의 공전주기는 지구일로 687일(화성일로 668일)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화성의 1년은 지구보다 1.88배 정도 긴 셈이었다.
그러한 농담에 진심으로 당황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묘하게 떨리는 감정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모에카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저 호기심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