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딱 한 걸음
자료를 서치하고 실험 수업을 한 후 결과를 모아 정리하니 벌써 논문 1차 심사일이 되었다. 전체적인 맥락만제시하면 된다고들 했지만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체 진행이 제시되어야 했고 결론을 어떤 관점에서 분석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도 준비해야 했다.
논문 심사를 준비하다 보니 이런 일정에도 모두 관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진행하고 다 인터넷 글을 읽으면서 준비했다. 또 조교의 도움도 받았다. 처음이라 어떤 순서로 진행하는지에 대해서도 정보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다 때가 있구나 뭐 이런 하나마나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 내가 많이 부족하고 막연한 생각만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그렇게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어찌어찌 논문 1차 심사일이 되었고 나는 어떤 결과든지 받아들이기로 하고 발표를 했다.
그때는 지도 교수님의 의견보다 심사를 보시는 다른 교수님들의 견해가 더 중요했고 그분들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 수정 및 보완을 해야 했다. 그중 한 교수님은 자신의 메일 주소를 보내주시고 지금까지 완성본을모두 보내라고 하셨다. 직접 주말에 읽어보시겠다고 하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막상 보내려고 하니 너무 내 논문의 초안이 부족해서 괜찮을까? 불안했다. 보내고 난 후 교수님께서는 답장을 보내주셨는데 참 다정하고 꼼꼼하셨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도 본질을 다시 확인해 보라는 역시명쾌한 평소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답변을 주셨다.
이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늘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어 보시고 피드백을 주셨는데 이분은정말 천상 교육자의 성향을 가지고 계셨다. 나도 가끔 교육자의 태도를 고민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분이 나의 롤모델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나에게 이분은 꽤 존경스러운 교육자이셨다.
자신의 지도 학생도 아닌데 이렇게나 친절한 답변과 응원이라니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나도 나중에 이런 따뜻한 교육자의 태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이 교수님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행된 2차 심사에는 모두 5분의 교수님이 함께 하셨는데 이 시간에 나는 정말 내가 많이 부족한 사람라는 것을 알게 된 동시에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질문은 날카로웠고 나는 버벅댔다. 어떤 순간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참담했다.
2차 논문 심사가 끝나고 늦게까지 진행된 심사 결과를 전해주시던 교수님의 첫 목소리에서 결과를 예상했고 괜찮다고 더 노력하겠다고 전화를 끊고 나서 운전하던차를 세우고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엉엉 목 놓아 울었다. 그동안의 고생과 힘든 것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고 그때의 기분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생각날 만큼 센 충격이었다.
인생을 지나오면서 많은 시련과 좌절을 겪었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지만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 논문심사 결과는 나에게 강렬했다. 다들 오랜 기간 논문을 쓰고 힘들었다고 말했지만 그때는 몰랐다.
누구는 이가 흔들려 임플란트를 하고 누구는 무릎이 나가고 허리 디스크가 오고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실제 이렇게 겪어보니 그들이 정말 힘들었겠구나 짐작하게 되었다.
지금 나도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 아마 그 시절의 후유증일 것이다. 그때는 치아까지 흔들려서 많은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리고 머리가 두쪽 나듯 울렸는데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과부하 걸린 것처럼 아팠다.
경험해보지 못한 두통으로 공부량을 소화하지 못하는 내 머리가 두 조각나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쓰지 않던 머리를 써서 사고하느라 그랬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두통과 차원이 달랐다.
사람이 극한으로 힘든 것이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같이 올 때인데 바로 그 시절이 나에게는 그랬다. 지금도 인생에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바로 그 시절이다.
저녁에 만난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나에게 맛있는 밥과 술을 사주었다. 다른 일정이 있었는데 모두 취소하고 만나러 와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남편 역시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우리는 말없이 무의미한 대화만 하고 밥을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달을 헤매었다. 아무것도 못할 정도의 무기력증에 빠져 잠만 잤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교수님들의 얼굴이 보였고 눈을 뜨면 힘든 현실이 느껴졌다. 그때 휴일 하루종일 밀린 드라마를 몰아 보고 많은 생각을 지우려 노력했다. 논문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머릿속에 어떤 학문적 입력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냥 마냥 시간이 지나 내가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나는 평범한 강사의 시간만을 보냈고 다시 일어섰다. 일단 지도 교수님께 앞으로의 진행 일정을 보고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어떻게 보완을 할 것인지를 알렸고 언제쯤 다시 찾아뵙겠다고 전했다. 교수님의 알겠다는 답변을 받고 나는 다시 달렸다.
새벽 5시에 책상에 앉았고 저녁을 먹고 최대한 논문을 썼다. 쉬는 시간마다 다른 논문을 읽고 참고하거나 연구 방향을 체크했고 그리고 나의 인생에 즐거운 것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지냈다. 이 모든 게 끝나면 웃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다시 논문 심사에 도전했고 그날은 처음 심사때와는 달리 긴장되지도 않았다. 탈락하면 다시 하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울지 말자 이런 생각도 하면서 심사에 들어갔다. 저번보다 부드러워진 심사 분위기가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되어서인지 나도 조금 여유롭게 진행했다.
발표를 마치고 다시 질문이 진행되었는데 대답에 최선을 다했고 부족한 것은 바로 보완하겠다는 다소 유연해진 나의 모습도 발견했다. 저번 논문을 보완한 부분을 모두 표시해서 드렸고 답변을 드렸다. 그리고 다시 보완한 부분 리스트를 만들어 어떻게 보완했는지도 말씀드렸다. 그리고 교수님들의 말씀을 열심히 적고 메모했다.
드디어 통과라는 결과를 받았다.
바로 보완해서 다시 교수님들을 찾아뵙고 말씀드렸는데 이때 교수님들의 따뜻한 태도는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를 안쓰럽게 보셨고 내 노력을 칭찬해 주셨다. 내가 하는 노력은 알고 계시는 것 같았다. 학문적 성과는 둘째치고 이 부분을 인정해 주시는 게 참으로 감사했다.
다시 옛일을 기억해 내며 쓰는 지금도 나는 그때의 감정이 순간순간 기억난다. 좋았던 좋지 않았던 모든 감정들이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게 조금 불편하다. 이 과정이 모두에게 다 힘들겠지만 굳이 끄집어내어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들 그럴 것이다. 학자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든 시절일 테니
다만 논문을 제출하면서 돌아섰던 그 도서관 풍경이 회색에서 연두색으로 바뀌었던 순간은 정확하게 기억난다. 나는 그때 홀가분해졌다. 박사 학위보다 그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길에서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나는 이제 자유다. 나는 이제 뭐든 잘할 것 같다. 계속 되뇌면서 집으로 돌아왔던 귀갓길!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을 끝낸 게, 그 과정이끝났다는 게, 지금 그것을 안 해도 된다는 게
잠시지만 아주 행복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