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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Jul 14. 2022

비눗방울만 불려고 했는데

심심하다, 가장 천진한 상태의 외로움

어릴 적에 나는 정말 심심했다. 하루 종일 심심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맏이고 동생들도 많아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면 심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일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내 준 숙제나 겨우 하고, 혼나지 않게 준비물을 잘 챙기는 거였다. 그 외에 나는 오늘은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까, 정확히는 심심하지 않게 보낼까를 궁리했다. 제일 좋은 건 하교할 때 아예 친구네 놀러 가거나 친구를 데리고 집으로 오는 거였다.  

   

몇 번 친구네 놀러 갔더니 친구 엄마가 “또 같이 왔니? 동생들도 많은 집에 웬 친구까지 데려오니?”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놀러 가지 않았다. 대신 친구와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도 남동생이 셋이었지만 그런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놓은 집은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나면 금방 지저분해졌다. 그래도 엄마는 친구에게 그만 놀고 가라는 말을 안 하셨다. 대신 친구들이 다 간 다음에야 “동생들도 챙기면서 놀라”고 했다. 난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친구들과 노느라 동생들은 늘 뒷전이었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으면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나는 왜 동생만 있는 걸까?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나를 돌봐 줄 텐데.’

동생이랑 같이 놀아야 할 때는 나도 따끔따끔거려 안 쓰는 털모자를 씌워주었다. 동생이 싫다고 모자를 벗거나 화를 내면 나는 더 화를 내고 “흥” 삐진 척 혼자 놀러 나갔다.

    

엄마가 시장에 가면서 동생들이랑 잘 놀고 있으라고 하셨다. 도망갈 겨를도 없이 동생들을 떠안게 되었다. 청개구리 같은 남동생들은 누나의 말은 무시하고 제 각각 하고 싶은데로 하는 고집쟁이들이었다. 나는 동생들과 어떻게 놀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퐁퐁이 눈에 띄었다.

비눗방울!! 바로 그거야!      


나는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퐁퐁을 물에 넣고 손으로 휘저으며 거품을 냈다. 비눗방울을 불어댔는데 생각보다 동그랗게 나오지 않았다. 동생들은 눈이 둥그레지더니 얼른 나를 따라 했다. 첫째는 솥 안에 있는 물에, 둘째는 항아리 안에 받아놓은 물에, 막내 동생은 세숫대야 물에다 비눗방울 거품을 냈다. 부엌은 온통 비누거품 천지였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비눗방울만 불려고 했는데. 이제 그만 하자.”

동생들은 늘 그런 것처럼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악당처럼 변해서 셋이 똘똘 뭉쳐 거품을 뿜어댔다. 내가 쫓아가자 그게 또 재미있었나 보다. 동생들은 낄낄 웃으며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엄마가 빨아놓은 빨래가 줄에 잔뜩 걸려 있었다. 동생들은 손에 묻은 비누거품을 마당에 나와 공중에 날리고, 나는 소리치며 쫓아갔다.


“이 녀석들, 뭐 하는 거야!”

마당에 들어서던 엄마가 호통을 치셨다.

엄마 눈에는 사 남매가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나게 노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누나답게 부엌에서 마당으로 뛰어다니며 “안 돼. 하지 마!”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동생들은 그게 더 재미있었는지 내 앞에서 살짝 멈췄다가 잡힐 듯하면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날 우리는 엄마한테 단체로 야단을 맞았다. 우린 서로에게 너 때문이라고 상대 탓을 했지만 속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혼난 것보다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한테 참 미안하다. 부엌에 물이란 물은 온통 비눗물로 바뀌고 솥과 그릇 심지어 찬장까지 온통 미끌거렸다. 마당에 널어놓은 깨끗한 빨래는 비누거품과 우리들 땀과 손자국으로 범벅이었다. 새로 산 퐁퐁은 다 써서 땅바닥에 굴러 다녔다. 엄마는 몇 시간을 쓸고 닦고 다시 빨래를 했을 텐데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교사로서 반 아이들이게 너그러운 때가 있다면 그건 다 엄마 덕분이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알아듣게 가르치면 된다.”

저녁마다 회초리를 때리거나 말을 무섭게 해서 벌을 주던 다른 엄마들과는 달리 우리 엄마는  회초리 없이도 장난꾸러기들인 우리 사 남매를 잘 품고 가르치셨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보면 심심하다는 ‘가장 천진한 상태의 외로움’이란다. 그때는 그냥 심심한 걸로만 여겼는데 남동생이 셋이나 되어도 어린 시절 나는 외로웠나 보다. 그나마 내 곁에 마음 따뜻한 엄마가 심심한 내가 무언가를 하도록 숨통을 틔어 준 게 정말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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