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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Jul 25. 2022

총각 만두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와락 안겼는데 할머니 몸에서는 콤콤한 청국장 냄새가 났다.  할머니가 오시면 나는 정신이 없었다.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나와 남동생들에게 팔씨름을 하자고 했고, 몰래 다가와 껴안고 뒹굴었다. 숨이 막혀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할머니가 풀어주기 전에는 나올 수 없었다. 할머니가 아니라 장난꾸러기 친구가 온 것 같았다.      


엄마가 안 계신 날 할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니?”
 할머니가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머니가 뭘 만들 수 있을지, 우리가 말한 걸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되었지만 “김밥”이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부엌으로 가서 밥솥에 있던 밥에다 참기름과 소금을 뿌리고 그걸 김에다 넓게 펼쳤다. 김에다 만 밥, 그게 김밥이었다. 엄마가 해 준 김밥은 단무지나 햄이 들어 있었는데, 할머니 김밥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밥인지 과자인지 모를 이상한 맛이 났다. 게다가 할머니는 그냥 먹어야 더 맛있다며 자르지도 않은 긴 김밥을 하나씩 주었다.


우리는 긴 김밥을 물어뜯으며 서로 바라보고 웃었다. 갑자기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흙으로 밥을 짓고, 나뭇잎으로 반찬을 만드는 거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재료도 없이, 할머니는 뭐든 말하는 대로 척척 만들어주는 마법사 같았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뭐 먹고 싶냐고 자주 물었고, 나와 동생들은 머리를 팽팽 돌리며 고민에 빠졌다. 뭘 먹고 싶다고 할까? 할머니는 그런 걸 어떻게 만들어 주실까? 아, 그거 말고 이걸 만들어 달라고 할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입에 침이 고이고, 없던 밥맛이 생기면서 음식을 본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은 동생이 할머니에게 만두가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만드는 걸 본 적 있던 나는 소리쳤다. "안돼. 만두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엄마는 만두소를 만들고, 만두피로 만두를 빚고, 만둣국을 끓일 고깃국물도 준비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한 시간도 채 되기 전에 만둣국을 들고 오셨다. 냄비 채로 밥상 위에 올라온 만둣국을 보고 우리는 입을 벌렸다.  이렇게나 빨리 만들다니, 김치 만두일까, 고기만두일까? 기대를 하며 밥상으로 다가갔다. 냄비 안에는 누런 국물에 커다란 만두가 둥둥 떠 있었다. 만두를 주문한 동생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뜨거운 만두를 호호 불더니 한입 크게 물었다. 


“으악! 이게 뭐야!” 

동생은 울상이 되어 만두를 씹지도 않고 뱉었다. 반쯤 잘린 만두 안에는 총각김치가 송글송글 그대로 보였다. 고기 하나, 두부 하나 없이 달랑 무로만 만든 총각 만두. 우리가 기가 막혀서 본체만체하자 할머니는 일부러 아주 맛있다면서 서너 개를 그 자리에서 잡수셨다.     


할머니는 요리하려고 장을 보지 않았다. 냉장고와 냉동실에 있는 재료를 찾아내서 우리가 말하는 음식을 주문하는 대로 만들었다. 음식을 만들면서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하고 중얼거렸는데 그 주문은 할머니한테만 통했나 보다. 우리가 맛없다고 안 먹는 것도 할머니는 아주 맛나다며 혼자 끝까지 다 잡수셨다.     


그날은 할머니가 먼저 국수를 해 먹자고 했다. 할머니의 국수 사랑은 아주 유명해서 따뜻한 밥과 먹다 남은 국수가 있어도 할머니는 팅팅 불어 터진 국수를 잡수셨다. 할머니가 만들어 온 국수는 오로지 국수뿐이었다. 비빔국수에는 삶은 달걀, 오이, 호박 뭐 이런 게 좀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누런 가루가 국수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할머니가 먼저 젓가락 가득 국수를 후루룩 잡수시면서 나에게 먹으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누런 가루 때문에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국수를 한 가락 입에 넣었다.

"윽, 이게 뭐야?" 나는 할머니를 쳐다봤다. 겨우 한가락 먹었는데도 느끼한 맛이 입안 가득 차올랐다. 


"수프가 잘 안 비벼졌네."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나는 그제야 알았다. 김밥을 말 때도, 만둣국을 끓일 때도 할머니는 우리 몰래 숨겨 놓았던 라면 수프를 넣은 걸 말이다. 


직장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어느새 할머니를 따라 하고 있다. 음식 솜씨도 없으면서 할머니처럼 아들딸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묻는다. 아이들은 어릴 적 나와 남동생들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둘이 귓속말을 하기도 하며 먹고 싶은 걸 다 말한다.

"돈가스, 짜장, 핫도그, 햄버거, 치킨."


나는 알았다면서 할머니처럼 자신 있게 냉장고로 향한다. 그러고는 겨우 찾아낸 닭고기를 우유에 재우고, 튀김옷에 살짝 카레 가루를 뿌려서 새 기름으로 닭을 튀긴다. 고소한 냄새가 나면 아이들과 함께 “맛있어져랴! 맛있어져라!” 주문을 건다. 할머니에게만 통한 주문과는 달리, 우리의 주문은 제대로 통했는지 아들과 딸은 집에서 만든 치킨이 사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뭐 먹고 싶냐고 물을 때 우리는 아주 행복했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은 밥에다 만 김밥, 총각 만두처럼 황당한 거였지만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만들기도 전에, 먹기도 전에, 뭐 먹고 싶냐고 물을 때부터 우리는 많은 음식을 상상하며 킥킥거렸다.  나도 할머니처럼  딸과 아들에게 "뭐 먹고 싶냐"고 가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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