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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성 Aug 01. 2023

입국 심사에서 커밍아웃을

시애틀 퀴어 여행기 01

아무리 ‘자유의 국가’에 도착했다지만 입국 심사에서부터 커밍아웃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입국 심사관은 정석적인 질문을 하면서도 은근히 디테일을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미국에 지인이 있느냐는 물음에 친구가 살고 있다고 답하면 처음 만나게 된 계기와 현재 직업과 거주 지역까지 검증해내고야 마는 식으로. 문제의 질문은 지문인식기에 두 손을 올렸을 때 나왔다. 아마 왼손 약지의 반지가 그의 예리한 눈길에 걸렸나 보다.


Where is your Significant Other. (파트너는 어디에 있습니까.)

음...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Significant Other는 현재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일컫는 중립적 호칭이다. 성별이나 성적 지향, 결혼 여부 등 어떤 것도 미리 전제하지 않는 표현으로 쓰인다. 원래는 학술적 용어로 등장했지만, 갖은 이유로 통상적 언어를 쓰기 어려워 대체 표현을 찾곤 하는 퀴어들에게 널리 채택되며 일상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공적 영역에서도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보니 심사관은 역시 그의 꼿꼿한 태도처럼 매뉴얼을 충실히 따른 것이리라.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영어로 3인칭 대명사를 말할 때는 필연적으로 성별 정보가 담기게 마련이다(그래서 대명사 지칭에 관한 운동도 활발히 진행 중이지만). Significant Other를 He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남성을 사귀는 사람이라고 일종의 커밍아웃을 해버리는 셈이 된다. 물론 ‘나의 파트너’처럼 성별이 모호하게 처리된 주어로 에둘러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대명사의 성별을 고민하진 않아도 되지만 사실 애당초 고민할 여지조차 없는 편이다. 사람들이 내게 연애나 결혼에 대해 물어올 때는 백이면 백 상대가 으레 여성임을 가정하고 있으니까. 모든 순간에 일일이 커밍아웃을 하기란 버거운 노릇이다 보니 나의 소박한 저항은 어떻게든 ‘여자친구’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애쓰는 수준이다. 물론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해맑게 무신경한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나의 발 아래 세상이 매섭게 깎여나가는 걸 느낀다. 무너지지 않도록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그들은 알 길이 없겠지.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회사 선배가 점심을 산다 하여 입사 동기와 함께 따라나섰던 날. 우리는 밥을 먹고 나서 의례적으로 카페로 향했다. 일 층의 카페는 열두 시와 한 시 사이의 공동 의식을 수행하는 직장인들로 북적여서 출입문 앞 작은 원형 테이블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이틀이면 잊어버릴 법한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다가 어느덧 연애가 화두에 올랐다. 내가 사귀는 사람(역시나 ‘여자친구’라는 단어를 썼다)의 사진조차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며 동기가 불평한 찰나였다. 이어 선배가 내뱉은 한 마디에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사내 아냐, 사내?


사내라니. 어떻게 알았지, 나는 남자와 연애 중인데... 선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슬쩍 떠보려고 말한 걸까. 아니면 지나가는 농담처럼 흘린 말일까.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면서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두 발이 구덩이 안으로 덜컥 가라앉는 기분에 현기증이 났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동기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잘랐다.


에이, 선배. 우리 동기 중에는 사내커플 없어요.


맞다. 선배는 같은 회사에서 이성 연인을 만나 결혼까지 골인한 사내커플 당사자였다. 결혼 소식을 알리기 전까지 주변에 숨겨야 했던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나 또한 같은 사연이 아닐지 짐작해봤을 뿐이었다. 나는 누가 게이 아니랄까 봐 사내라는 말에 대뜸 남자부터 떠올리고 김칫국을 마신 것이 면구스러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다시 말했다.


그럼 뭐야. 연예인이라도 사귀냐.

뭐래요. 하하.


웃어 넘기려 했지만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예기치 못했다.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어야 맞을 것 같은데 도리어 씁쓸함이 밀려왔다. 회사 동료는 그렇다 쳐도 심지어 연예인까지 비밀 연애 상대가 될 수 있는데 동성애자일 가능성은 고려조차 않는구나. 눈치를 채고 배려해서 넘긴 말일 거라고 애써 선해할 여지마저 느낄 수 없을 만큼 선배는 오후 한 시의 햇살보다도 더 해맑은 표정이었다. 


연인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오직 헤테로 관점으로만 해석할 줄 아는 이들 앞에서 퀴어로서의 나는 존재할 자리가 없었다. 좁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있는데도 나만 홀로 멀리 떨어진 듯한 외로움이 스며들었다. 선배의 사내연애 시절 볼 만했겠다며 짐짓 짓궂게 화제를 돌려버렸지만 뒤에 이어진 대화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무너진 지반을 다시 다지느라 마음이 바빴다. 정상 규범의 사회에서 내가 딛고 있는 발판은 잔물결만 일어도 위태로운 모래성이었다.




짧게 주저했지만 결심이 섰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와서까지 정체성을 감추진 말자.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대명사를 골랐다.


He’s at home. (그는 집에 있어요.)


심사관은 고작 삼 초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무슨 오만 가지 생각을 했는지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단지 이전의 집요한 태도로 왜 같이 오지 못했는지 이유를 캐물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의 자물쇠가 딸깍 풀리는 소리를 들었다. 열린 틈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심장이 부풀었다. 평범한 질문에 대해 대명사를 골라서 답했을 뿐인데 얼떨결에 커밍아웃을 한 것처럼 됐다. 사실 질문부터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했으니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용기를 낸 것이기도 했다. 심사관 개인이 성소수자 친화적인 사람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매뉴얼을 따랐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다양한 정체성을 포괄하는 용어를 권하는 것이 사회의 표준이라면 이곳에선 퀴어로서의 나 역시 지워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


분명 커밍아웃이라 부를 만큼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다만 낯선 사람에게 처음으로 나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커밍아웃에 준하는 해방감이 남았다. 괜히 으쓱해지는 기분에 시시한 농담까지 건네보았다. 웃음의 흔적조차 내비치지 않은 심사관은 질문 몇 개를 더 하고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진 않지만 그동안은 마음의 에너지를 조금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 거짓 없는 모습으로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왠지 모르게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하늘로 떠오를 것만 같은 감각을 붙들고 공항 밖을 향해 걸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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