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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성 Aug 14. 2023

르즈부트쿠아, 플러스

시애틀 퀴어 여행기 02

입국 심사에서 커밍아웃을 하며 시작한 하루는 공교롭게도 시애틀에서 프라이드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도로 정비로 인해 임시로 변경된 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매다가 느지막이 축제가 열리는 공원에 도착했다. 처음 잔디밭을 밟을 때만 해도 공원이 어느 정도 규모일지 짐작하지 못했다. 늘 펜스로 막힌 구획 안에서 열렸던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기억 때문에 지레 위축됐던 탓일까. 축제 현장에 들어서면서 시야가 탁 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그만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21세 이상만 입장 가능한 주류 판매 구역을 별도로 구분해놓았을 뿐, 공원은 그 밖의 어떤 인공적인 경계도 두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펼쳐진 너른 잔디밭과 주변 모두가 우리 차지였다. 북 치며 부채춤을 추거나 확성기 너머로 기도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읊는 혐오 세력이 비집고 설 자리는 물론 없었다.


얼마 전 대구에서는 시장이 ‘성다수자의 권익’ 또한 중요하다고 선언하며 퀴어문화축제를 막으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공무원과 경찰이 충돌하는 유례없는 해프닝 끝에 축제가 무사히 치러지고 나자, 기독교 계열의 한 언론사는 퀴어가 도로를 점거해도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법 위에 군림하는 ‘최강자’라고 비아냥댔다. 텍스트만 놓고 보면 1%의 ‘최강자’ 퀴어들이 ‘성다수자의 권익’을 짓밟는 힘을 휘두르는 무법자처럼 읽혔다. 세상에, 평생 나한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많은 퀴어들은 단 하루라도 안전한 공간 속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자유를 만끽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무더위에도 기어코 피켓을 들고 나서는) 혐오 세력의 눈에 퀴어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의견이 분분한 소재’로 취급될 뿐, 함께 미래 사회로 나아갈 동료 시민으로는 보이지 않는가 보다. 21세기도 어느덧 주류 판매 구역에 입장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한국에 사는 우리는 하루의 자유조차 ‘성다수자’들에게 허가받아야 하는 피로감에 여전히 짓눌려 있다.




시애틀 프라이드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림자가 지지 않는 잔디밭 위에서 자유롭게 노닐었다. 아무 곳에나 앉거나 누워서 음식을 먹었다. 편을 갈라 배구를 했고 정체성 플래그를 몸에 휘감은 채 애정표현을 나누었다. 쨍한 원색 물감으로 페이스 페인팅을 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비교적 얌전한 아이들은 레즈비언(또는 그렇게 패싱되는) 커플의 손을 잡고 신중히 기념품을 골랐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과 강아지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초록 잔디 위를 슥슥 가로질렀다.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의 투쟁 상태인 사회적 아젠다들이 이상적인 결실을 맺은 모습이 부럽다 못해 조금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우리는 모두 열린 공간에서 이렇게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인데.


부스는 여느 축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푸드트럭은 성황리에 음식을 팔았고, 룰렛을 돌려 공짜 경품을 주는 곳에는 어김없이 긴 줄이 늘어섰다. 한 부스에는 방문객들이 포스트잇에 메모를 적어서 붙이는 보드가 놓여 있었다. 메시지를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보았다.


You are important.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짧은 문장 하나를 본 순간 가슴에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끝없는 자유가 주어진 듯한 이곳에서도 여전히 많은 퀴어들이 자기 의심에 시달리거나 사회의 소수자로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편견에 맞서고 있을 것이다. 각자의 싸움은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잊지 말자고 건네는 메시지가 고마웠다. 언제나 이런 말을 듣고 싶고, 함께 옆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우리에겐 서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연대가 필요하다. 온갖 자유로운 퀴어들을 가득 담은 눈이 무지갯빛으로 촉촉하게 물들어갔다.




메인 스테이지에서는 요란한 메이크업과 의상을 두른 드랙퀸들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퍼포먼스 사이마다 틈이 빌 때면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시간을 벌어주었다. 반짝이는 연두색 스팽글을 흩뿌려놓은 블랙 드레스를 딱 붙게 맞춰 입은 사회자는 공연 흐름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현란한 말솜씨로 관중들을 쥐락펴락했다. 게다가 쉴 새 없이 조크를 날리는 와중에도 프라이드와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나는 드랙퀸 사회자의 독특한 말투에 깊이 빠져들었다. 압권은 LGBTQIA+의 알파벳을 일일이 호명하기 힘들다며 이제부턴 소리 나는 대로 부르겠다고 선언한 대목이었다. 그는 혀를 부드럽게 굴리면서 입술을 오므려 LGBTQIA+를 관능적인 발음으로 옮겼다.


르즈부트쿠아, 플러스.


마치 프랑스어를 발음하듯 우아하게 ‘르즈부트쿠아’를 말한 후 잠시 멈추었다가, 숨을 밭게 뱉으며 ‘플러스‘를 덧붙이는 패턴. 처음에는 단지 기발하다고만 생각했던 말인데 반복해서 말하다 보니 어느 순간 오묘하게도 마법의 주문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로 최강자의 능력을 내려줄 것만 같은 주문. 누군가를 짓밟는 힘이 아니라 서로 손을 잡았을 때 샘솟아나는 궁극의 힘을 줄 것 같았다.


다 같이 주문을 외면 내 곁의 사람들에게도 오늘 차오른 마법의 힘을 전할 수 있을까. 찬란한 깃발들이 덮인 잔디밭을 스치던 바람에 실어 보내고 싶었다. 허락받은 단 하루가 아니라 영원히 자유로운 바람이 팔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입술을 움직여 몇 번이고 주문을 걸었다. 르즈부트쿠아,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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