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선한량 Mar 26. 2024

나의 꽃을 피우기까지

-지속 가능한 버팀으로 힘을 의식하고 활용하다

작년 연초에 했던 온라인 치유 글쓰기 모임에서 하나의 주제를 받고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원하는 힘은 ____________이다.”

제시어를 받고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단상을

자유롭게 적으면 된단다.     

우선 힘의 개념부터 찾아봤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나 능력으로 개인이나 단체를 강제적으로 따르게 하는 세력이나 권력"     


'힘'은 보통 권력자가 행하는 것으로만 보아왔다.  

하지만 힘에도 결이 다른 것들이 있다.

세속적이고 정형화된 기준보다는 내 안의 잠재된 역량과 가능성에 더 시선이 간다.

나만이 할 수 있고 내 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런 에너지를 발산하는 일을 말한다.     


과거 힘을 발휘한 경험을 돌아본다.

대학시절 미국 탐방을 다녀온 경험이 떠올랐다.

우연히 들어간 대학교 성경 모임에서 동기, 후배들과 해외연수 붐이 일던 시기에 ‘미국 대학교와 영화제작 스튜디오 탐방’이라는 주제로 낯선 땅을 밟았다.


대학 초년생들끼리 의기투합한 좌충우돌 이벤트였다. 잘 알지 못했기에 무모했지만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했던 나날이었다. 성취의 흔적보다는 내 일상 면면에 흐르는 의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 실체는 누군가를 감당하고 조직을 대변하는 일을 하면서부터 자각하기 시작했다.       

안정을 주지만 누군가에게 메이는 '구속'으로도 느껴지는 게 있다. 내게 가족이 그랬다.

정현종 시인 "방문객"의 시구처럼 거대한 하나의 또 다른 세계를 맞닥뜨리는 일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커다란 세계를 겪어내고 누군가를 감당하고 책임을 배워가고 또 내 의지를 벗어나는 일들을 몸으로 통과하면서 조금 더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습관에서 뿌리 깊은 세계관의 차이까지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깨우쳤다.

빨래를 갠 후 아이와 아내의 서랍을 헷갈렸던 일이 저녁에는 또 다른 분쟁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대가족을 이루는 처가와 단출한 네 식구의 삶을 지나온 본가와의 문화적 차이 그리고 막다른 이혼의 위기까지 삶은 그야말로 다채로웠다.     

또 다른 한 축인 국립공원 직장 생활도 또 다른 굴곡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코드가 맞지 않는 상사를 만난 경우가 최악이었다. 고압적인 사고를 가진 소장, 무능력한 과장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조직문화는 나와  맞지 않았다.

특히 근무성적 평정과 승진이 이뤄지는 연말과 연초의 시기에는 먹구름 속에 앉아 홀로 비를 맞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공평한 평가보다는 인사권을 가진 소장의 코드를 잘 맞추는 사람이 평가를 잘 받았다.

윗선에 어필하라는 조언을 종종 받기도 했다. 한때 명절시즌 소장에게 과일상자를 보내고 상사의 술자리에 동석해 보기도 했지만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난 나의 길을 갔다.

직장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주변 동료의 말에 의하면 인사 시즌에는 한 달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지 못하는 나의 태도가 못 미더워 아내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누가 윗사람들에게 그렇게 어필하고 싶겠어?

그냥 살기 위해 하는 거지”   

  

15년이라는 직장 생활을 주변 환경에 잘 맞춰왔다.

낡은 부조리도 잘 감내해 왔다.

그렇게 긴 시간을 견뎌내며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상황과 분위기에 잘 맞춰온 성향 덕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무엇에 이끌리는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글과 독서 그리고 운동은 그 틈바구니에서 나를 지켜준 무기였다.     


같이 보다 혼자 일하는 게 편하고 사람들의 자극에 생각이 많아지는 타입이다.

국립공원 자연환경해설사들의 실무자가 되어 사람들을 이끌고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일상을 꾸려나가는 생활은 무력감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통찰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혼자가 편하지만 나만 잘한다고 해서 프로그램을 온전하게 운영할 수 없었다.

‘같이’의 가치를 품어 안아야 궁극적인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 아내의 말에서 또 다른 나를 짚어보기도 했다.

그런 관점으로도 세상을 바라보자 북적대는 그 안에서도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삶의 테두리 안에서 안정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늘 뭔가를 갈망했다.

실체 없는 그리움은 차 안에서 음악을 듣다가 눈물로 나오기도 하고 나를 잡아끄는 문장 앞에서

 멈춰 세우기도 했다.

중년의 사춘기가 그즈음 시작된 것이다.


나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다.

나의 재능과 기질로 나의 인생 과업을 이루고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리면서 교감하는 거다.


자기 발견을 통해 풍성한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고 싶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건대 그 긴 시간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버팀’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되었다.

이 또한 나의 힘이다.

김혜남 저자의 책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서

‘버티기’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  

  

"버틴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나, 모멸감, 부당함 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기대 행동에 나를 맞추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는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힘든 과정이다. “ 

    

이 문장을 보자마자 묘한 위로가 되었다.

쉽지 않았지만 너끈히 소화를 해내온 맷집 있는 내 안을 보고서 안도했다.

그 작지만 소중한 힘이 내게 있었다.     

난 지금 직장 현업에서 인생 과업과의 접점을 찾고 있다.

의미 없는 점이라고만 넘겨왔던 그간의 흔적들이 조금씩 이어지고 있다.


대학시절 노래패에서 부르던 노래를 최근에 다시 부르기 시작하고 대학 영상동아리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전하고자 했던 나의 인생 메시지는 중년 사춘기 아저씨의

 펜대에서 다시 쓰여지고 있다.     

길지만 난 줄곧 그 하나만을 위해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일었다.


우리는 작은 민들레 꽃씨다.

아직 풀밭에 작은 씨앗으로 땅속에 있지만 나의 꽃을 피우기까지 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물도 주고 적절한 햇볕을 쬐이면서 더불어 곤충들의 매개로 적절한 수분이 이뤄지기도 해야 한다.     

현업이라는 꽃밭에서 난 나의 인생 실험을 진행 중이다.

하루 일상의 대부분을 직장이란 곳에서 보내고 있다.

크고 작은 부침에도 지치지 않고 과업을 무대 위로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지속 가능함은 어디에서 온 걸까?


이제 글쓰기 모임의 문장을 완성해 보련다.

"이를테면 내가 원하는 힘은 '버팀'이다"


국립공원의 자연자원을 소재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화두로 인생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그 지속성은 내 안의 성장 욕구라는 에너지에서 나온다.

그리고 늘 꿈꾸고 갈망하는 형용할 수 없는 실체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는 그리움이 되기도 하고 슬픔과 서러움 그리고 희열로 슬며시 터져 나온다.     


모든 것은 결국 내 안에 있었다. 이제 꺼내놓을 용기만 준비하면 된다.

‘나’라는 욕망 덩어리를 동력으로 난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내어놓고 사람들이 와서 누리면서 충족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마리 미운 오리 새끼 일지도 모른다.   

저 멀리 호숫가에 우아한 백조의 깃을 어루만지며 유유히 헤엄치는 한 무리의 새들이 보인다.

발을 담가보니 조금 차갑지만 감당할 만하다.

당당하고 여유 있는 백조 한 마리가 호수를 가로질러

새로운 무리에 합류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