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글쓰기란?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써내려 가는 일이다.
직장인에게 승진은 비즈니스의 꽃이다. 난 그 꽃의 향기에 취하기보다는 꽃길에서 어중간하게 비켜서
있었다. 올해 소장이 바뀌었다. 그는 차분함이 묻어나는 인심 좋은 리더이자 신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했다.
나의 딱한 사정을 알았는지 특별 승진 과업을 내게 맡겼다.
만년 ‘간장 게장’인 김 계장 에게 팀장이라는 직함도 내주었다. 풍성하지는 않지만, 먹을만한 밥상을 차려보라고 사람을 지원해주고 돈까지 부쳐줬다.
단 밥상은 물론이고 반찬과 밥, 수저와 숟가락은 내가 마련해야 한다. 영화배우 ‘황정민’은 영화제 수상소감에서 스태프들이 만들어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근사한 말을 남겼지만 난 지금 밥상 위에 이것저것 올려놓기는 했으나, 밥상을 들다가 허리가 휠 지경이다. 노안이라 상을 놓을 자리가 어디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중년의 불룩한 배를 감당하지 못해 휘청거리다 보니 반찬이 쏟아질 지경이다.
이름하여 특별 과업 명은 “국립공원 현장 개선 TFT(프로젝트팀)”이다. 과별 주니어 레인저들을 거느린 김 팀장은 옆에는 고문인 보전 과장이 그 위로는 소장이 버티고 있다. 특별 애칭도 하사했다. ‘손톱 밑의 가시’ 손톱 밑의 뭔가 박히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게 있을까?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겠다는 근사한 비전도 담고 있다. 소장의 제안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든든한 갑옷과 무기 같았다. 누군가 가 나를 바라봐 준다는 사실은 직장인 페르소나에 묵직한 무게감을 줬다. 하지만 늘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종종 일하다 보면 뒷머리가
근질거렸다. “김 계장님 요즘 손톱 밑의 가시는 잘 돼가요? (키득 키득)”
작년 연말 근무 평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미 전임 소장은 본인과 같은 직렬의 다른 후배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타 사무소로 전출을 간 상태다. 신임 소장은 고민 끝에 전담반을 만들어 소위 똥차가 다 된 나를 수렁에서 건져주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체력의 한계가 먼저 다가왔다. 몇 시간이면 소화했던 업무처리가 이틀은 붙잡고 있어야 겨우 초안을 마련할 정도였다. 내 나이 반 백 살을 곧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국립공원 레인저다. 자연 속에서 탐방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로 사람들과 만난다. 자연을 누비면서 환경의 중요성과 쉼과 힐링 서비스를 제공한다. 5, 6월은 탐방프로그램과 행사가 많은 달이다. 기본 업무에 소장의 과업이 얹히면서 허덕이는 날이 많아졌다. 새로운 팀에 합류한 새파란 후배들과 같이 현장을 누비는 자연환경 해설사들에게 뜬금없는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반기기보다는 모두 담담했다. 아니 침묵했다.
기질적으로 난 현장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일하기보다 혼자가 편하다. 이번 특별 과업은 전혀 나를 닮지 않는 프로젝트다. 시설물을 설치하거나 직장 동료들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일이 많다. 연말 평가를 위해 어떻게든 그럴듯한 성과를 만들어 내야 했다. 울며 겨자를 먹다가 어느 순간 등 떠밀려 무대 위에 홀로 올라서 있는 게 아닌가
조직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만 선택 할 수도, 지시가 떨어지면 따라야 하는 룰도 모르는바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과 내 생각과의 괴리감이 컸고 그래서 일에 속도가 붙지 않았고 실적도 미미했다. 그나마 국립공원 정상에 탐방객 편의용 의자와 벤치를 설치하는 작업은 영선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냥 내 방식대로 성과를 낼 수는 없을까?’
내 방식을 어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회사는 의사결정권자의 의견을 받드는 곳이었다.
그즈음부터였다. 내 가슴에도 배수로가 있었으면 했다. 갈 길을 찾지 못한 내 안의 모든 것들은 노폐물이나 응어리가 되었다. 선순환을 시켜야 했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들여보내는 작업이 내게는 글쓰기였다.
감정의 파고가 출렁일 때마다 노트와 핸드폰에 메모 하거나 녹음 했다. 삶의 의문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다. 글쓰기는 물음표를 계속 물고 늘어지는 지난한 과정이다. 산책 하거나 운전 하거나, 화장실 변기에 앉거나 샤워 할 때 운이 좋으면 인사이트나 아이디어를 만나기도 한다.
나와 닮은 꼴인 글쓰기는 소란을 떨지 않는다. 다만 중재할 뿐이다.
오늘도 나를 다독이고 타인을 이해하고 사회를 배워나간다.
최근에 모빌스 그룹의 대표님의 롱블랙 인터뷰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식물의 성장은 달라요. 필요한 속도로 자기 종과 생애주기에 맞춰 성장하죠.
저 또한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내게 맞는 속도로 자라고 싶어요.”
사람은 성장을 하지만 식물은 생장(生長)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잎과 뿌리를 뻗어 광합성과 영양분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조금 늦더라도 주변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 자기의 깜냥껏 영역을 넓혀간다.
난 지금 나의 속도로 가고 있다.
오로지 나의 근육과 온전함의 힘으로 나답게 걸어가고 싶다.
사회적인 시선에 휘둘리기보다 묵묵히 오늘 하루를 더듬어 가련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면 난 무능한 직장인이다. 짱짱한 인맥도 승진이라는 행운도 나의 것이 아니다.
회사는 조직의 방식으로 상황과 문제를 해결해 가지만 나의 방식은 더디다. 그럼에도 나만의 이유와 의미를 찾으면 누가 말려도 발동이 걸릴 사람이다.
소장은 특별 과업 뿐만 아니라 행정 부서로 전과를 권유한 적이 있었다. 난 정중하게 거절했다. 연필깍이 통 안에서 닳아지는 연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은 더뎌도 나의 물에서 놀고 싶었다. 나의 몸과 영혼이 반응하는 곳이 곧 나의 놀이터다. 아이디어를 설계하고 국립공원이라는 공간에서 터를 파고 자연과 인문, 예술, 문화를 버무려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초를 세워 조금은 거창한 내 비전의 건물을 세워나간다.
삶은 자주 딜레마와 모순이 뒤엉킨다. 나의 일상에서부터 가족과 회사의 일까지 사회의 기대와 나의 욕구
사이에서는 종종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무엇보다 세상의 시선을 마주하되 나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소 위에 올라와 있다. 양극단을 오가면서 무게중심을 찾아다닌다. 내 몸과 정신이 허락하는 생장곡선에 따라 적정 시점과 지점을 본능적으로 더듬어 나간다.
소장의 응원에 어깨가 들썩이다가도 해설사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금세 기운이 빠진다. 그러다가 내 안의 그리움과 갈망의 기운으로 다시 에너지를 채우고 일상을 다져간다. 끊임없는 모순을 직시하고 상황에 잠식당하지 않고 일상을 붙들 수 있도록 되새김질을 한다.
오늘도 불완전함 속에서도 나의 온전함을 써내려간다.
삶은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써 내려가는 일이다.
소박하지만 온전한 나만의 식탁을 차린다.
차디 찬 물 속에서 휘감기듯 손에서 만져지는 촘촘한 쌀이 올올이 만져진다.
착착 감기는 압력밥 솥에서 ‘푸 우우’ 흰 김이 피어 오른다.
마늘장아찌와 푹 익어 검붉어진 신 김치를 상에 올린다.
물을 탈탈 털어 낸 담배 상추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젠 신김치의 깊은 맛과 장아찌와 깔끔함과 속이 시원해지는 상추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상 놓을 자리나 불룩한 배를 더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내 입맛에 맞는 재료와 반찬 가짓수를 의식하지 않고 손과 허리가 수고해준 밥상 머리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기쁨을 이제는 안다.
단촐한 한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잘 아는 나만의 밥상이다.
풍미를 더해줄 내 사람들을 초대할 일만 남았다.